“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염려하는 자로 자란다.”
- 장 자크 루소
선생님들은 나를 아껴주셨다. 공부를 곧잘 했고, 친구들과도 별 탈 없이 지냈다. 튀진 않았지만 눈에 잘 띄는 아이였던 것 같다. 말수가 많진 않았지만 질문을 던지면 눈을 마주치고 또박또박 대답했고, 숙제도 성실히 해냈다. 무슨 일이든 맡기면 알아서 척척 해냈다. 나를 가르친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내 똑똑함과 가능성을 알아봐 주었다고 느꼈다. 혼난 기억은 거의 없다. 애초에 혼날 만한 일을 만들지 않았다. 사랑받고 있었다고, 지금도 그렇게 기억한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늘 불편했다. 선생님들의 관심이나 칭찬, 다정한 말이 싫었던 건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기대가, 어쩐지 날카롭게 느껴졌다. “넌 잘할 거야.” “나는 네가 할 수 있다고 믿어.” 그 말들이 내 마음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말은 따뜻했지만, 그 끝에는 늘 ‘그러니까 이번에도 해내야지’ 하는 눈빛이 따라붙었다. 기대는 어느새 의무가 되었고, 의무는 곧 두려움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어를 꽤 잘했다. 단어도 잘 외웠고, 문장을 읽는 속도도 빠른 편이었다. 영어 선생님은 수업 중간마다 무작위로 학생을 지목해 단어 뜻을 묻곤 하셨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굵은 자물쇠로 꿀밤을 때리셨다. 그 묵직한 소리와 뒤따르는 웃음소리는 교실 안에 자주 울려 퍼졌다. 내 앞에서 여러 명이 꿀밤을 맞았지만, 나는 그 일 년 내내 맞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쩌다 답을 틀리면 선생님은 오히려 “너답지 않네” 하며 고개를 갸웃하셨다. 나는 굉장히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수업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앞 번호 아이들이 질문을 받는 동안, 내 심장은 요란하게 뛰었다. 손끝까지 긴장으로 저릿했고, 입술이 마를 정도로 숨을 삼켰다. 맞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맞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이 훨씬 무거웠다. 내가 잘하는 걸 보여주는 시간은, 늘 불안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 긴장은 그때뿐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상황이면, 몸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잘한다는 말은 칭찬이기보다 숙제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마음이 버거웠다. 그래서 더 조용히, 더 무던하게 지내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게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보낸, 나 나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 시절의 나를 얌전하고 믿음직한 아이로 기억하겠지만, 나는 나를 감추는 일에 서툴지 않았던 아이로 기억한다.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두려워 조용했던 아이로.
돌이켜보면, 사랑이 고마우면서도 두려웠다.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몰랐다. 받는다는 건 책임이 따라오는 일이라 여겼다. 늘 잘해야 하고, 그런 내가 아니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니 마음을 열기보단 거리를 뒀고, 가까운 사람조차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랑은 꼭 견뎌야 할 일이 아니었고, 기대를 다 채우지 않아도 괜찮았다는 걸. 그때 그 선생님도, 그 친구들도, 사실은 내가 무엇을 해내느냐보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나를 좋게 여겼을지 모른다.
더는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 나를 사랑해 준 순간이 있었다면, 그걸로 족하다. 나는 이제 사랑을 빌리듯 받지 않으려 한다. 기대도 없이, 다짐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아무 말 없이도 조금쯤 따뜻해지는 존재. 그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