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으로 숨은 이유

by Erasmus Kim

그 누구도 당신을 판단하지 않는 곳.

조용히 나를 회복시키는 곳.

혼자인 듯하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곳



퇴사 후 첫날 아침 9시. 버스를 타고 예닐곱 정류장을 지나 국희도서관에 도착했다. 개관 시간에 맞춰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 창밖으로 햇살이 스미는 자리를 골랐다. 커다란 유리창 옆, 한적한 책상. 나는 출근하듯 셔츠를 단정히 여미고 양복을 입었다. 단지 넥타이 하나만 빠진 옷차림이었다.

며칠 전, 존경하던 상사가 회사와의 갈등 끝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와 함께했던 우리 팀도 해체됐다. 대부분은 이미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고, 나만 유일하게 회사에 남기로 했다. 그날 오후 2시쯤, 회사를 나섰다. 정문을 지나 사거리를 건너 작은 공원 옆 도서관으로 향했다. 햇살이 깊숙이 들어오는 통창 앞, 삼면이 막힌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나는 힘들 때면 늘 도서관으로 숨었다.
취업에 실패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날.
성과를 인정받지 못해 자존심이 무너졌던 날.
사랑이 끝나고 마음이 텅 비었던 날.
그럴 때면 어김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신착도서 코너를 돌아보다가 제목이 눈에 들어오는 책 한 권을 슬쩍 집어 든다.
스르르 책장을 넘기면 퍼지는 그 종이 냄새.
커다란 미술책을 넘길 땐 유광 코팅된 종이에서 묻어나는 향.
차분히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문학책을 읽는 어른의 여유.
자기 계발서를 펴 든 청춘의 열정.
시간을 재어가며 기출문제를 보고 또 보는 학생들의 간절함.

그 속에서,
나는 다시 세워졌다.
조금씩, 그리고 조용히.

궁금했다. 도서관이 내게 어떤 의미일지.

“밀턴 선생님, 도서관은 제게 어떤 의미일까요?”

“당신이 선택한 장소는, 당신이 아직 말로 표현하지 못한 필요를 대신 말해줍니다.”

“필요...라고요?”

“도서관이 주는 고요함, 책의 질감, 무언의 규칙. 그 안에서 당신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을 느꼈던 건 아닐까요? 그리고 책으로 가득한 그 풍경은 당신 내면의 다양함과 가능성을 비추는 거울일 수도 있어요.”

“음...”

그 누구도 당신을 판단하지 않는 곳. 조용히 나를 회복시키는 곳. 혼자인 듯하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곳. 그게 바로 도서관의 본질 아닐까요?”

“맞아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신이 힘들 때마다 도서관을 찾았다는 그 반복된 선택. 그건 이미 스스로를 돌보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네요.”

“그곳은 당신에게 뭐라고 말하던가요?”

“… 그냥 잠시 쉬었다 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아마도 도서관은 이렇게 당신에게 말을 건넸을 거예요. ‘지금 당장 뭘 하지 않아도 괜찮아. 계속 달리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선, 너는 그냥 있기만 해도 돼.’”



세상의 기준은 말한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멀리 가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도서관을 떠올리고, 그곳에 머문 모든 순간에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작가의 이전글질문의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