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직의 회의 풍경
회사에서 첫 프로젝트가 떨어졌다. 한 가수의 세계관을 만드는 일이다. 그녀가 부른 노래 영상을 보자마자 입덕해버렸다. 차갑고 영롱한 느낌을 주는 외모에, 너무나 좋아해 마지않는 알앤비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를 갖고 있다.
매력적인 아티스트의 작업에 참여한다는 기쁨도 잠시 걱정이 들었다. 내가 맡은 가수는 방탄소년단이나 엑소처럼 취향이 확고한 10대 여성 팬을 겨냥한 그룹이 아니다. 내 또래의 사실조금,조금,조금,더어린 20대 여자 솔로 가수다. 방탄소년단의 화양연화 이야기나 SM 프로듀싱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엑소의 판타지 세계관을 모티브로 할 수는 없는 인물이다.
대표님은 나와 디자이너 소영, 가수 A를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법인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오스트리아를 가든 뉴욕을 가든
이거 가지고 맘껏 친해져 보세요.
20대 여자들로 이뤄진 우리는 금세 그룹명까지 지어졌다. 각 이름의 앞 글자를 딴 서세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주어진 것을 양껏 질껏 활용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며칠 뒤 오후 1시 우리 셋은 한남동에서 만났다. 입사하자마자 오스트리아나 뉴욕으로 덜컥 가버릴 수는 없으니 외국 느낌 넘치는 한국의 힙스트리트를 방문했다.
밤 10시까지 대화가 이어졌다. 가수와 가수를 서포트하는 직원의 관계로 만났으나 결론적으로 우린 친구가 됐다. 잠깐 봤을 때는 몰랐던 A의 진지함과 장난기 어린 모습, 그리고 매력을 볼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 든든했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스트레스가 찾아왔다. A를 조금 파악한 것만으로는 대중 앞에 내놓을 세계관을 만들 수 없었다. 첫 번째 결과물을 보고하는 금요일이 이틀 뒤로 다가와 있었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어떡하나. 이 발표로 나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 것 아닌가. 걱정이 밀려왔다.
성과에 대한 압박으로 약간의 공황에 빠지기 직전, 나는 사고방식을 재정비했다. 아티스트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평일 업무 시간을 빼 달라고 요구한 것처럼 회사의 인적 자원을 활용하기로 했다. 소영과 발표할 내용을 논의한 뒤 사수 B에게 자문을 구했다. 화요일 미팅 뒤 이러한 결과를 얻었는데 1차 보고에서 어떻게 전달해야 회의 참석자들에게 도움이 될지, 나의 퍼포먼스가 인정받을 수 있을지 방법을 알려달라고 물었다. B는 발표 구성과 단계를 정리해줬다. 그리고 일적인 문제나 고민이 있을 때 혼자 끙끙 앓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라고 말했다. 경험 많은 선배의 조언이었으나 내게는 마치 부탁처럼 들렸다.
B의 조언에 따라 금요일 발표를 잘 마쳤다. 발표가 막힐 때는 도리어 회의에 참석한 분들께서 격려의 말을 던졌다. 참석자분들의 피드백을 통해 소기의 성과가 있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본격적인 프로젝트는 시작도 전이다. 나는 소영과 이 프로젝트의 첫 단추를 꿰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고, 자신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스케일이 크거나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회사에 들어와 처음 발표를 주도하며 느낀 점들이 있다.
먼저 성공의 경험이 주는 동기부여의 효과다. 많은 경영자들이 실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백발백중 성과를 올리는 일은 불가능하며, 성공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않은 증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부분은 실패만큼 성공 경험을 쌓는 일의 중요성이다. 인간은 자만심에 빠지기 쉽지만 그만큼 자책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남 탓을 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때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애초부터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실제 문제점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분석해 보면 패인은 다각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성공의 기억을 자신감과 두려움 극복의 발판으로 삼을 때, 더 나은 내가 되기도 한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 행운이라 여기는 점은 성장을 돕는 팀원이 많다는 점이다. 즉, 우리 회사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 입사 전 대표님을 만났을 때 조심스럽게 퇴사율을 물었다. 2년간 퇴사한 직원이 5명 미만이었다. 스타트업 조직에서 퇴사는 숙명이다. 5명에서 시작해 30명 규모의 회사가 되기까지 퇴사 비율이 적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빠른 성장 속에서도 구성원 간 신뢰가 있다는 것, 그리고 기대하는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성장을 기다려 준다는 의미로 읽혔다.
금요일 회의는 이런 나의 생각에 객관적인 믿음을 주었다. 사수 B뿐만 아니라 팀장급의 조직원들이 나의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며 평가하는 시선이 아니라 ‘잘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응원의 시선을 느꼈다. 그 마음이 발표에 대한 피드백, 말투, 표정, 제스처 등 모든 부분에서 풍겼다.
경영학의 석학 피터 드러커의 <매니지먼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람을 매니지먼트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리는 일이다. 사람은 약하다. 가련하리만치 약하다. 그래서 문제를 일으킨다. 절차와 여러 가지 잡무를 필요로 한다. 조직의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란 비용이자 위험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부러 비용을 부담하거나 위험을 감당하려고 사람을 쓰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고용하는 까닭은 그 사람이 지닌 장점이나 능력 때문이다. 조직의 목적은 사람의 장점을 생산으로 연결하고, 그 사람의 약점을 중화시키는 것이다.
사람이 최대의 자산이다.
한 명 한 명의 태도가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곳은 발전 가능성이 높은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약점보다 강점에 초점을 두고, 이를 북돋워 주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회사에 다닌 지 2주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두 번째 직장을 선택할 때 나의 기준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회사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앞으로 더 깊이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더 많은 사람과 부대낄수록 불평도 아쉬운 감정도 늘어갈 것이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이 성과를 올리도록 끌어주는’ 팀원이 한 명이라도 있는 이상, 내 성장에 필요한 회사의 물적 인적 자원을 가능한 한 활용할 것이다. 그래서 나의 선택을 믿고 더 자주 회사를 자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