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다낭 워크샵 일지
회사 워크샵을 두 달 전부터 기획했다. 변화와 도전을 사랑하는 대표님과, 천방지축(못난 사람이 종작없이 덤벙대는 일이라는 뜻)인 나는 워크샵 일정을 수도 없이 뒤엎었다. 우리의 기획안은 변화무쌍했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케이스1. 여섯 개 조가 합정 사무실에서 출발해 다음날 부산 숙소에 도착한다.각 조는 말도 안 되는 30개의 미션을 능력껏 수행한다. 창의성과 도전 정신을 도모한다. 미션 난이도에 따라 배점을 달리 한다. 1등 팀에게는 어마무시한 선물을 준다.
대표님: 세리씨 모 갖고 싶어요? 나: 아이패드요. 대표님: 아이패드 사서 트로피처럼 전시할까요? 사람들 동기 부여되라고. 나: ㅎㅎ좋죠. 이 대화는 ㅎㅎ와 함께 공중분해됐지만 순간 나는 거의 올림픽 선수급 투지에 불타올랐다.
※첫날 숙박은 야영 취침. 텐트에서 침낭 펴고 자야 함.
케이스2. 다 같이 출발해 강화도에서 짝피구나 발야구나 몸으로 말해요와 같은 단체 게임을 한다. 건전함과 협력을 도모한다.
※첫날 숙박은 야영 취침. 텐트에서 침낭 펴고 자야 함.
케이스3. 산속에서 서든 어택 게임을 한다. 진취력과 경쟁심을 도모한다.
※첫날 숙박은 야영 취침. 텐트에서 침낭 펴고 자야 함.
케이스4. 조별 미션을 수행하고 다음 날 부산 숙소에 도착한다. 요트에서 선상 파티를 연다. 애사심을 도모한다.
※첫날 숙박... 이하 생략.
케이스1부터 4까지 꽤 구체적인 일정이 나왔지만 결국 모두 무산됐는데, 이유는 하나였다.
나: 대푯님 진짜 정말 11월에 텐트 치고 자면 입 돌아가고 죽을지도.. ×20
대표님: 그럼 따뜻한 해외로 가시죠!
그래서 우리는 비교적 안전한 여행지인 베트남 다낭으로 최종 결정하고 출발 2주 전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처음으로 가는 해외 워크샵인 만큼 대표님과 임원진은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를 원했다. 나는 처음부터 소피 팀장님과 기획을 해왔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일정을 짤 수 있었다.
손쉽게 기획할 수 있었던 건 몇 번의 케이스 변동에도, 코어 프로그램만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날 초록 박스 안에 '자기 심상 모형 워크샵'이라는 게 있다. 텐트에서 잠을 자고 창의력을 요하는 미션을 생각해 내거나, 서든 어택 게임을 구상하는 도중에도 이 프로그램은 언제나 고정적이었다.
<실력은 연차와 비례하지 않는다>라는 한 디자이너의 브런치 글을 보고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이 글에서는 심적 표상이란 시스템을 소개한다. 내가 지향하는 자기정체성을 인지하고, 특정 상황에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머릿속의 정보 패턴이다.
글을 쓴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는 10대 시절 막연히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막상 디자이너가 되고 보니 '디자이너'라는 단어 하나로는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되고자 하는 나를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업 앞에 '○○한 디자이너'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함께 일하고 싶은 디자인 전문가'는 이 작가의 자기정체성을 대표하는 말이다. 그는 함께 일하고 싶은 디자인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 혹은 전문성을 그림과 같이 여섯 가지 키워드로 정의했다.
글의 부제는 사수 없이도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자기 성장을 책임지는 의식적 연습의 힘'이다. 나는 조금 다른 해석을 더했다. 심적 표상은 회사가 아닌 개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고, 대표와 이사진과 사원의 미션을 맞추는 과정이라고.
회사는 냉혹한 현실이다. 투자(인력) 대비 이익(자본)이 적으면 인사 관리가 불가피하다. 사람을 쓰는 일에는 평가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직원과 회사의 디폴트는 공적 관계다.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정석적으로는 개인의 퍼포먼스도 공적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하지만 이윤 창출이 회사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것은 아니다. 근대적 주식회사의 시초인 동인도회사가 발생한 이유는 기업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16세기까지 기업의 수익 배분은 일회적 발행으로 끝났다. 한 번의 무역 출항과 회항이 끝나면 회사는 해산됐다. 하지만 주식 투자 제도가 들어서면서 기업은 유지되고 몸집을 불려 나갈 수 있게 됐다. 이 또한 더 큰 이윤을 벌어들이기 위해 형성된 시장이지만, '더 오래 지속되는 기업'에는 단순히 자본 이외의 가치들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그 가치란 것은 일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주는 체계,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덜고 일하는 사람의 의지를 북돋는 감정적 배려, 상식, 사회에 대한 선한 영향력, 회사의 미션과 개인의 일치감 등 많은 것을 포함한다.
더 오래, 성장하는 회사가 되기 위해서는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함께 워크샵을 기획한 소피 팀장님, 밍키와 (우리 회사는 영어 이름이나 닉네임을 쓰지 않는다. 소피와 밍키는 순수하게 애칭이다!) 심적 표상 발표를 워크샵의 메인으로 넣었다. 스물두 명 모두가 1분 스피치를 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40분 동안 에이포 용지에 심적 표상 그림을 그리며 열중했다. 슥삭슥삭 하는 연필 소리가 듣기 좋았다. 발표에서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보고서처럼 내용과 형식이 정갈한 발표자가 있는가 하면, 종이를 든 손이 벌벌 떨리면서 "지금 이렇게 손이 떨릴 정도로 저는 내향적인 사람이에요. 그래서 누군가 업무와 관련해 부탁을 하면 거절을 잘 못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업무적으로도 더 냉정한 시각을 갖고, 사람들과 더 친해지려고 노력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발표자도 있었다.
대표님은 회사의 매출 상황과 2020년 계획, 앞으로의 비전을 이야기하면서 회사를 통해 개인이 꿈을 이루도록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자신의 부족한 점, 동료 평가에서 나온 피드백을 솔직하게 밝히고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 시간은 너무 짧았다. 혹여나 어색한 분위기에 망할까봐 노심초사했던 것은 기우였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배우길 원한다. 직원 한 명 한 명이 사업에 대해 같은 이해도를 갖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닫게 됐다. - <파워풀>에서
사업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게 되면, 개인에게 향했던 평가는 팀 차원으로 확장된다. 다 같이 잘해서 회사를 성장시키고, 스스로도 발전하자는 암묵적인 가치를 내재화하게 된다.
2박 3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다. 이 두 시간이 구심점이 되어 다낭에서의 나머지 시간을 즐겁게 해줬다. 그저 농담을 하고 바닷가에 누워만 있어도 함께 있는 사람들과 끈끈함을 느꼈다.
이 모든 감사를 11월의 추위에게 돌린다. 다낭에 있는 동안 서울 기온이 영하 4도였다고 한다. 맙소사. 다행이다. 하마터면 텐트 안에서 떨며 코를 훌쩍일 뻔했다.
대푯님 다낭은 힐링이었읍니다. 혹한기 훈련은 담 기회를 기약하겠읍니다!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