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첫째 주 목요일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단혼제는 정말 자연스러운 걸까. 철학 교수이자 캐나다 협동 연구 프로젝트 ‘사랑의 본질’ 책임 연구원인 저자는 첫 장부터 ‘남자 친구의 집에서 나와 남편이 있는 집으로 향하고 있다’고 밝힌다.
저자에 의하면 사랑이란 개체 보존을 위한 인간의 생물학적 유산이자 사회적 관습의 산물이다. 남녀 간의 로맨틱한 사랑부터 퀴어 연애, 다자간 연애까지 21세기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A : 두 사람을 사랑해본 적 있으세요? 저는 두 명을 동시에 좋아한 적도 있는데. 나만 그런가?
B : 그게 원래 더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해요.
A : 친구들은 ‘네가 연애 상대자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거야’라고 말하던데.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런데 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사랑의 종류에는 열정적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 우정의 형태로 나아가는 필로스, 초월적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가 있다고. 나와 내 연인의 관계는 호르몬이 폭발하는 상태를 넘어 필로스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죠.
나에게는 폭발적인 에로스적 사랑에 대한 갈망도 있다, 내 안에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공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달까.
B : 다자간 연애의 핵심은 상대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A : 영화 <her>에선 그러잖아요. 인공지능이 641명의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고 선언하면서 ‘마음은 가득 채워지는 상자와 같지 않습니다. 마음은 사랑할수록 더욱 커집니다’라고.
C : 책에서는 생물학에 대해 얘기해요. 요즘 핫한 것 중 하나가 진화 심리학이잖아요? 유전자가 결정하는 대로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관점. 인간의 번식 본능과 사랑을 연관 지어 얘기하는 건데, 이 책은 이에 대한 반감으로 사회적 차원에서 사랑을 보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의 접근이 좋다고 생각해요.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 심리학이 꾸준히 발달하고 있다고 주장하잖아요. 과학과 숫자에 의한 계몽주의적 사고가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저자는 이런 일방 통행적 주장에 제동을 걸어요. 사회 문화적으로 산출된 사랑도 있고, 동성애 양성애 폴리아모리처럼 진화 심리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랑도 있다고요. 바로 여기에 이 책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D : 폴리아모리뿐 아니라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고 있는 단혼제에 반박하는 사람들이 가진 의문을 한 가지로 압축하면 이거예요. 과연 애를 낳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E : 진화 심리학 관점에선 사랑을 인간의 본능과 연관 짓죠. 그럼 출산은 인간의 유전자를 위한 것으로 귀결돼요. 그런데 현실에는 사회 문화적 영향으로 출산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F : 그 본능을 억제하고 사는 건가요?
C : 제 생각엔 ‘생물학적인 사랑과 사회 구성물로써의 사랑이 동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 혹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가 이 책의 포인트인 것 같아요.
B : 리처드의 관점에서 사회 문화적 영향을 해석해 봅시다. 리처드라면요,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하는 이유 역시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 때문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아이의 생존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을 거예요.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출산을 포기한다고요. 먹을 게 없는 사막에서 생존을 위해 선택적 출산을 하는 것처럼, 개체 수를 줄여서 인류를 계속 유지한다는 의미죠.
E : 출산하지 않으려는 심리조차 생존 본능이다?
B : 그렇게 볼 수 있죠.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E : 근데요, 주변에 출산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면 ‘개체 수를 줄이는 데 기여를 하겠어!’ 이렇게 마음먹은 게 아니잖아요. 사회가 안 하도록 만드는 거지.
F : 사회가 힘들어진 부분도 있지만, 아이를 위한 희생보다 나의 삶을 중시하는 쪽으로 의식이 개선된 이유도 있지 않을까요?
B : 소득 분위별 통계를 보면 고소득 계층에서 출산율이나 혼인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요. 리처드식 관점에 근거가 될 수 있죠.
저는 기술의 발달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요. AI가 발달하면 지금만큼 인구가 필요 없어요. 예전 그리스 시대처럼 유토피아적인 세상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는 거죠. 인간은 단순 생산과 관련 없는 비생산 활동에 전념할 수 있어요. 우리처럼 책 읽고 문화를 향유하게 될 거예요. 지금처럼 인구가 많으면 그런 세상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F : 꼭 미래 전망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지방에 잠깐 내려가기만 해도, 뭐하러 서울에서 이렇게 아등바등 살지, 이런 생각이 들던데요.
A : 맞아요. 내가 어떤 환경권에 들어 있느냐에 따라 사고방식이 정말 많이 달라져요. 여행자일 때는 외국에서 민박집을 하고, 알바만 하고 살아도 만사가 내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에서 경제 주체로 살아가다 보면 이상한 야망이 생겨요. 1등 하고 싶고, 다 해 먹고 싶어요. 이게 맞는 것만 같고.
결국 출산율 감소의 원인이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서라거나, 사회 문화적 영향 때문이라거나 모두 동일선상의 이야기 아닐까 싶어요. 한국에선 엄마가 절대적으로 희생해야 하고, 아이를 케어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깊잖아요. 아이를 낳으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왔던 거죠. 그런데 중국만 봐도 아빠가 육아 휴직 쓰거나 엄마가 유치원 보내 놓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든요. 우리 사회에서는 과잉보호가 일종의 관습이 된 셈이죠.
D : 가부장제의 개혁으로도 연결될 수 있겠네요. 예전의 가부장제는 결혼과 출산이 생물학적인 결과라는 의견에 일정 정도 역할을 했어요. 폭력이나 전쟁으로부터 인간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출산을 해왔으니까요. 우리나라, 중국, 인도가 예전에 출산율이 높았던 건 이후 유교 문화와 접목했기 때문이고요.
반면 유럽은 가부장제가 자연스럽게 무너지고 있긴 해요. 프랑스의 동거 문화가 그 예죠. 나라마다 가부장제에 대응하는 방식이 차이를 낳는 것 같아요.
C : 잠깐만요, 우리는 여기서 엄청난 함정에 빠져 있어요. 왜 사랑과 출산은 연결되어야 하는가.
B : 사랑 이야기를 해볼까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한 번도 그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F : 없으면 안 되는 거?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차이를 어디서 들은 적 있는데요. ‘있어서 좋다’와 ‘없으면 안 된다’는 건 어마어마한 차이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건 호감을 넘어서는 일이니까요.
C : 근데 이 책에선 ‘그냥’ 사랑도 아니고 ‘로맨틱한’ 사랑을 계속 얘기하거든요.
F : 어쩌다 보니 ‘사랑=로맨틱’이 공식화돼버렸네요.
C : 과거에는 자유연애보다 집안과 집안의 결혼이 흔했잖아요. 병조판서 댁과 이조판서 댁의 자녀가 만나서 혼인하고, 혼인하는 날 처음 봤죠. 그들이 같이 살면서 정이 붙어서 평생을 살게 됐어요.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고 인정을 했어요. 이것도 로맨틱한 사랑으로 볼 수 있을까요?
B : 책에서는 8세기 영국에서의 사랑과 현재 캐나다에서의 사랑은 다르다고 말해요. 사회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과거의 사랑이 존경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거죠. 시대에 따라서 로맨틱한 사랑의 정의도 달라질 수 있다고 봐요.
A : 저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지지고 볶고 싸우며 살아도 사랑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더 이상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죠.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면 손예진이 너무 매력적인 사람으로 나와요. 매력이 넘쳐서 주체할 수가 없어요. 다른 이성한테 그걸 계속 뿜어내야 하는 사람이에요. 근데 손예진과 결혼한 남자 중 하나는 손예진이 좋은 이유를 이렇게 말해요. 적어도 자신에게 거짓된 게 없고, 자유롭게 삶을 즐기는 모습이 멋있다고요. 저자도 책에서 하는 말이 ‘우리한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건 너무 다양하고, 우리의 무한한 다양성은 어느 한두 가지 표준 모델로 축소될 수 없다’고 해요. 다자간 연애든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사랑하는 행위든, 결국 뭔가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개인의 특질과 굉장히 연관되어 있다고 봐요.
근데 사회가 하나의 답만을 표준이라 제시하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봉착해 있는 문제 아닐까요? 사람의 성질이 다양한 만큼,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의식 자체가 올라가는 만큼, 사랑의 종류도 형태도 다양하다고 생각해요.
B : 비슷한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가벼운 만남, 원나잇. 그건 사랑이 아닐까요? 만난 기간에 따라 사랑의 진실성이 결정된다고 보시나요? 전 하룻밤 사랑이라도 진실될 수 있다고 믿거든요. 오래 만났다고 하면 '와, 정말 숭고하다. 어떻게 50년을 한 사람만 보냐'면서 박수 쳐주고, 첫사랑과 결혼했다고 하면 대단하단 듯이 보는 그런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조성돼 있잖아요.
A : 그런 얘기 들으면 막 답답하던데.
B : 원나잇을 밥먹듯이 해, 그럼 쟤는 ‘문란해’라고 낙인을 찍어버려요. 책에선 잡년, slut이라고 표현하던데, 그러니까 원나잇을 하는 사람은 과연 사랑을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F : 전 좀 생각이 다른데요. 사랑은 지속하려는 마음과 이어지는 거 아닌가요? 하루에 끝내버릴 수 있는 사랑이라면, 사랑이라고 못할 것 같아요.
E : (웃음) 그 순간 압축된 고농도의 사랑을 했다면?
F : 그래도 사랑한다면, 이 사람을 계속 보고 싶어 하고 미래를 그리게 되잖아요. 근데 하룻밤 만에 정리되는 사랑은...
B : 하룻밤 밀도 있는 고농도의 사랑을 경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이것도 사랑이고, 저것도 사랑 아닐까요?
D : 하룻밤 사랑이 꼭 성관계로 이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B : 그렇죠. <Before Sunrise>를 봐요. 거기서 성관계를 빼봅시다. 하룻밤 동안 엄청난 소통을 했어. 그래도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거죠.
C : 재밌네요. 그럼 하룻밤 온라인 채팅으로도 사랑을 할 수 있겠네요.
C : ‘내 짝을 찾아간다’는 것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양다리도 걸쳐 보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고, 결정하고 고르고.
E : 엄청 똑똑하고 뻔뻔하고 부지런해야 돼요. 그래서 자기 기준에 맞는 사람을 골라서 행복하면 할 수 있는 거고,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하면 못 하는 거고.
F : 목적성이 다른 거 아닐까요? 그렇게라도 만나고 싶다는 목적성이 확고하면 여러 사람을 가볍게 만나 보고, 재볼 수 있겠죠. 하지만 한 사람을 꾸준히 바라보고 만나고 싶다면, 그런 식으로 사람 만나는 데 마음이 가지 않겠죠.
C : 혹시 그 목적이 학습된 거라면? 그 학습된 것이 거부되고,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나 <아내가 결혼했다>의 손예진의 삶이 정상처럼 여겨진다면?
A : 학습된 걸 버린다는 개념을 넘어서서, 사회 전체가 변해야 저도 변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책에서도 나오는데, 내가 아무리 그런 사고를 갖고 있어도 사회적 의식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어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도 남편이 두 명인 손예진은 모든 가족 행사를 두 번씩 치르거든요. 결혼도 두 번, 돌잔치도 두 번. 본인은 행복하게 자기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외부에선 인정할 수 없는 삶인 거예요. 가족들조차 알아선 안 되는 비밀스러운 삶. 사회적으로 이에 대한 합의가 돼 있지 않으면, 혼자만 느끼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닌 것 같아요.
C : 불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회화가 잘 돼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눈초리 하나로 그들이 불편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해보셨어요? 물론 항상 상처 받고 피해를 보는 분들이 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요.
B : 이런 생각은 해봤어요. 엄마에게 다른 남자가 생기면 응원해 줄 수 있을까?
F : 저는 반대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저한테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둘이 동거하는 건 상관없지만, 가족 행사에 함께하고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하길 바라는 건 좀... 결국 인정을 안 한단 얘기일 수도 있겠네요.
E : 자기 자식이 동성애라는 걸 알았을 때도 비슷할 것 같아요.
C : 그걸 페미니즘 쪽에서는 소위 옹호적 혐오, 온건적 반대라고 얘기를 해요. 그들은 개인에게 확실히 초점을 맞추는 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공동체와 집단에 좀 더 초점을 맞추는 편이고. 그 둘이 부딪힐 때 보통은 소수자가 피해를 입는 경우가 역사상 많았죠.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어요. 사회 전체가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