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녀로 태어난 나는 아빠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동생과 연년생이었기에 혹여나 동생에게 관심이 쏠리는 동안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진 않을까 그래서 마음이 다치진 않을까 줄곧 고민했다고 한다. 따뜻했고 다정했으며 애틋한 사랑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 아빠는 모든 걸 할 줄 아는 그저 가능한 사람이었다. 내가 해달라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어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든 알려주고 가보지 못했던 곳은 커다랗고 따뜻한 손안에 가득 품어 데려가 주었다. 내 세상은 아빠의 발걸음과 함께 조금씩 넓어졌고 그 넓어진 세상 안에서 단단하게 자라는 중이었다.
아침마다 내가 학교에 신고 갈 신발을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닦아주며 웃어 보였던 그 얼굴은 세상 누구보다 든든했다. 학교 행사가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일을 빼고 달려왔다. 먼발치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아빠의 손짓은 언제나 가장 크게 흔들렸다. 어딘가에서 넘어져 옷을 망쳐오면 혼을 내기보다는 제일 먼저 뛰어와 탈탈 흙을 털어주기도 했다. 주말이면 늘 어딘가로 떠났다. 동물원, 박물관, 기념관, 낯선 공원들까지. 그렇게 아빠의 발걸음을 따라가며 내 세상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어른이 되어갔다.
하지만 아빠의 세상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친구, 학교, 사회를 만나며 그 세상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이유도 모른 채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똑같았지만 그 길 위에서만큼은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따뜻한 공기에 결국 참아왔던 눈물이 퐁퐁 터져 나왔고 방 한구석에 웅크린 채 잔뜩 쌓여버린 무거운 하루를 와르르 쏟아냈다. 아빠는 그런 나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어떠한 말도 더하지 않았다. 그저 소파에 앉아 조용히 숨만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땐 그 모든 게 서럽고 서운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티 한 점 없는 어둠이 내려앉는 밤이 되면 아빠의 발밑으로 무수히 많은 담배꽁초가 쌓였다는 사실을. 연기로 가득한 공기 사이에서 아빠는 말하지 못한 걱정을 하나 둘 태워 보냈다는 것을. 결국은 쓸쓸히 타 들어가는 불꽃만 바라보며 나보다 더 깊게 아팠을지도 모른다.
아빠는 여전히 그 세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빠의 손을 천천히 놓고 있었다. 돌아보면 누군가의 세상을 넓혀준다는 일은 결국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내어주는 일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빠는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경험을 잘라 나에게 건네주었고 그 하나하나가 내 삶에 스며들어 지금의 나를 이루는 조각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아빠가 만들어준 세상 위에서 조금씩 나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언젠가 무서운 꿈에서 깨어나 죽음이 두렵다며 울음을 터뜨린 밤이 있었다. 끝이라는 단어가 주는 막막함이 어린 마음을 무섭게 짓눌렀고 그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압도되어 숨이 가빠 오던 순간이었다. 아빠는 말없이 내 작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오래오래 그 긴 밤을 함께 했다. 그리고 아빠는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이별이라고 말했다. 어린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했고 아빠도 무서운 것이 있구나 안심하며 잠에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여러 이별을 겪으면서 비로소 그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별은 단순한 헤어짐이 아니라 내 안의 조각이 떨어져 나가는 경험이라는 것을. 그래서인지 그날 밤 아빠가 건넸던 말이 해가 바뀌고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끝까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순간은 여전히 상상하고 싶지 않다.
아빠가 평생 쌓아온 세상의 조각들은 나에게 조금씩 옮겨졌고 이제는 그 조각들이 모여 나의 하루를 만들고 나의 선택을 이끌고 내가 살아가는 방향이 되어준다. 아빠가 건네준 세상은 내 안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그 사실이 문득 고맙게 느껴지는 날들이다.
내 첫 세상이자 첫사랑이었던 아빠에게 오늘만큼은 가만히 무릎을 베고 누워 간지럽게 속삭였던 그 어느 날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