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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Feb 07. 2023

내 꿈은 기자였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퇴사가 벼슬은 아니지만 2

“넌 왜 기자가 됐어?”

“제가 어렸을 때 애틀랜타 올림픽을 신문으로 봤는데요. 그 때부터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 나도 서울 올림픽 보고 기자 되기로 맘 먹었는데… 기자가 되고 나니까 다른 꿈이 필요하더라고. 너도 그럴 거야. 앞으로 잘 생각해봐.”     


 본격적인 퇴사 얘기를 하기에 앞서, 뭇 사람들에겐 ‘안물안궁’일 얘기를 좀 해야겠다.      

 

 나는 작년까지 햇수로 10년 차 일간지 기자였다. 사회부, 온라인뉴스부, 편집부, 문화부, 젠더연구소, 사회정책부, 국제부를 거쳤다. 초등학교 2학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래로 한 번도 장래희망이 ‘기자’에서 바뀐 적이 없으니 ‘성덕’(성공한 덕후)이라 하겠다. 그 해 방학 숙제로 신문 스크랩을 했고, 엄마의 지도 하에 마침 여름에 열린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기사를 신나게 오려 붙였다. 현장에서 직접 올림픽을 보고, 그걸 글로 쓰고, 신문에 이름 한 줄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래 여자 아이들이 다들 ‘선생님’이나 ‘간호사’를 얘기할 때, 같은 직업은 얘기하기 싫어 전전긍긍하던 그 당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해뵈는 직업이기도 했다.


 별다른 이탈 없이 그 꿈을 향해 꾸준히 달렸다. 고등학교 때 이미 내 맘속으론 ‘대학 가면 정치외교학과를 전공해 정치부 기자가 되어야지’ 했다. 국문과로 입학했지만 곧 정외과로 전과를 했고, 졸업 직전에는 우리나라 정치 1번지를 보고 싶다던 바람에 따라 국회에서 인턴 비서로 일했다. 졸업 이후엔 이른바 ‘언론고시’를 위한 부단한 수양 끝 2013년 12월, 고대하던 일간지 기자가 됐다. 백수로 2년을 꼬박 지낸 것 빼고는, 별 버퍼링이 없는 삶이었다.     

 

 앞의 문답은 입사해 ‘수습 기자’ 신분으로 신문사 편집국 내 부서 순환을 하던 때의 얘기다. 당시에 만난 어느 여성 차장이 내게 물었다. 입사한 지 며칠 안 돼 매사에 뚝딱거리며 경황이 없던 그 당시에도 타이핑을 하던 차장의 손톱 끝에서 피어나던 어떤 권태, 가 기억난다. ‘다른 꿈이라고요? 아직 이걸 즐기지도 못했는데요.’ 당연히 차장의 그 말은 수습 사원의 귀에는 들어왔다 튕겨져 나갈 말에 가까웠지만, 내가 지금껏 그 말을 기억하는 걸 보니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내가 그 말을 언젠가 복기하리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나보다.     

 

 나는 9년 간을 꼬박 한 직장의 ‘사원’보다는 ‘기자’에 가깝게 살았다. 이른바 ‘까라면 까’라는 직장인으로서의 자아가 부족해, 하고픈 거 다 하고 사는 부류였다. 예를 들면 내가 관심 없는 분야의 취재는 더없이 느슨하고 게으르게 임했고, 관심 많은 분야는 두 눈을 번득이며 지면이 차고도 넘칠 만큼 길게 써내려갔다. 그 온도 차가 극심해서, 같은 사람이 쓴 기사건만 기사의 톤은 늘 오르락 내리락했다. 흔히들 기자는 제너럴리스트여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특정 분야 과몰입러에 가까웠다. 스페셜리스트라기에는 많이 부족하고.


 내가 좋아한 것은 한 사람의 인생 역정 인터뷰, 그리고 여성 인권, 문학에 관한 기사였다. (써놓고 보니 지극히 단출하다.) 특히 나는 수습 기간과 직후 사회부 생활에서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단독 기사’를 물어오는 능력이 매우 떨어졌다. 사건 사고는 관심이 없었고, 나 말고 어디선가 쓸 기사라면 ‘굳이 내가…’ 하는 안일한 생각에 더해 그래봤자 신문 귀퉁이 200자 원고자 3장 남짓 내러티브 없이 들어가는 게 영 싫었다.


 게다가 나는 신문 기자를 하기엔 글을 명료하게 쓰는 능력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명료’라 함은, 소위 ‘야마’(기사의 핵심)를 잡아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라고 똑 떨어지게 쓰는 능력을 뜻한다. 그런데 나는… 타사 기자와 같은 사안을 취재해도 ‘기’와 ‘아니’를 판별하는 능력이랄지, 혹은 똑 떨어져 보이게 쓰는 능력이랄지가 부족했다. 기자 일을 하면 할수록 ‘세상에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일이란 없다’는 생각이 부쩍 커졌다. 진작부터 여러 루트를 통해 ‘기’로 알려져 있는 사건도, 내가 들여다보면 ‘기’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아니’도 아니고. 근데 그걸 작은 지면에 똑 떨어지게 쓰기에는, 내게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9년 동안, 다행한 일이 있다면 나는 그 때 그 때 내가 원하는 부서로만 발령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건 기자 2년 여, 왼갖 사건 사고에 지쳐갈 때쯤 나는 온라인뉴스부로 가게 됐다. 거기서는 지면 기사에 비해 훨씬 긴 호흡으로, 내가 원하는 글을 쓸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연애 칼럼을 연재할 기회를 얻었다. 패션지도 아닌 시사 일간지에서 연애 칼럼 연재라니. 온라인 부서여서 가능한, 다른 기자들은 누리기 힘들 기회였다.

 

 그 해, 나는 ‘이슬기의 러브 앤 더 시티’라는 제목의 칼럼을 40회 연재했다. ‘서른 즈음의 어중간한 연애 이야기’를 표방한 칼럼은 큰 인기까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연재 일정이 미뤄질 때면 독자들의 귀여운 항의 메일을 한 두통 받았고, 무엇보다 칼럼에 사연을 제공했던 지인들의 떠거운(?) 성원을 받았다.


 문화부에서 문학 담당으로 2년 반을 보낸 것 또한 큰 기쁨이었다. 나는 정외과로 전과 이전에 아주 잠깐 ‘엑스 국문과’ 였고, 그 전에는 고3 내내 수능 공부는 덜 하는 대신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는 완독한 전력이 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는 업무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는 소설을 ‘폭독’(‘폭식’ 같은 뉘앙스로 책을 한꺼번에 많이 읽음)하는 방식으로 풀었다. 소설 속에서 나와는 다른 세계를 한참 유영하고 나서 고개를 들면, 현실의 각박함은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아득함이 좋았다.


 문학 기자로 지내는 2년 반은 내게, 딸기타르트에서 가장 아껴먹는 딱딱+파삭한 가장자리 같은 시간이었다. 좋아하던 소설을 실컷 읽었고(그 바람에 한동안 소설이 싫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만나고 싶었던 문인들은, 어떡해서든 만났다. 그러나 잘하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기사는 사실 전달에 충실한 것이 1순위건만, 내가  읽은 소설 못지 않은 흐드러지는 미문을 쓰고 싶어 글을 짜내고 또 짜냈다. 타사 조간을 확인하는 아침이면 백일장 대회 결과를 기다리는 초조한 초등학생 같은 심정이 되었다. 절로 오줌이 마려웠다. 결과지(타사 지면)를 받아 들면 매번 좌절과 질투, 열패감이 범벅돼 또 머리를 싸맸다.


 그 불같던 2년도 지나 인사 발령 시즌이 왔다. 입사 8년 차, 사회부 사건팀에서 기자로서의 통과의례도 치렀겠다, 온라인뉴스부에서 연애 칼럼도 써보고, 문화부에서 보고 싶던 소설가‧시인들도 실컷 만나 봤으니… 나는, 정말로, 기자직에 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 직후 만났던 차장의 조언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 꿈은 기자였지만 내 다음 꿈은 기자가 아님을 이제는 인정해도 되겠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을 때, 이만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2018년 12월, 고 이어령 선생님을 인터뷰하던 당시의 모습. 선생님의 예의 그 유명한 서재에서, 고대와 현대부터 전 우주를 가로지르는 광활한 얘기를 전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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