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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Feb 18. 2023

첫 퇴사의 고비: 네? 겸임이라고요?

퇴사가 벼슬은 아니지만 3

 2년 반 문화부 기자 생활이 남긴 건 내게는 연예인이나 다름없었던 문인들 실컷 보기, 뿐만이 아니었다. 페미니즘에 입문해 온통 사로잡혔던 시기가 바로 그 때였다.


나는 페미니즘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도 몰랐고, '미투' 국면에서도 몰랐다. 여자라서 차별 받는다는 감각은, 어려서부터 엄마로부터 '걸스 비 앰비셔스'(Girls, be amtitious)를 강하게 수혈 받은 속칭 '알파걸'이었던 내게는 전무후무한 감각이었다. 함께 기자를 지망했던 친구가 "우리가 여자라서 남성 기자를 선호하는 언론사 시험에서 자꾸 떨어진다"고 했을 때 겉으로는 동의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결국 능력이 문제가 아닌가...'했다. (물론 언론사에서도 MZ세대 들어서는 여성 기자 수가 폭발적으로 급증, 그 나이대에는 여성 기자가 남성보다 많은 경우도 왕왕 생겨났다. 그러나 실제 응시자 수가 여성이 훨씬 많은 것을 감안하면, 합격자 수는 인위적으로 성비를 맞추는 등의 '남성 안배'를 하는 것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최종 면접에서는 이런 질문도 받았다. "결혼해 육아를 하면서도 기자 일을 할 수 있겠냐"고. 2013년 그 당시로서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질문이었기에(지금으로 생각하면 경천동지할 일이다) 나는 침 한 번 꿀꺽 삼키고 태연자약하게 답했다. "어머니한테 충분한 급여를 드리고 (애를) 맡길 겁니다." ... 굉장히 똑부러지고 야무진 답변이라고, 당시의 슬기는 스스로의 대처 능력을 칭찬했다.


그랬던 나는 문화부 2년 반 동안 문학을 읽으서부터 여러가지 성차별의 현장이 다름아닌 나의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체감했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을 시작으로 윤이형 <작은마음동호회>, <붕대감기>, 박민정 <바비의 분위기> 같은 소설들을 읽자 내 삶이 새롭게 다시 읽혔다. 육아는 오롯이 여성의 몫이기에, 내게 "일과 육아는 어떻게 병행할 셈이냐"고 묻는 게 밥 먹듯 자연스러운 일이던 면접관, 집까지 가는 밤길을 걷는 일이 매번 공포스러워 뛰다 걷다 하며 연신 뒤를 돌아봐야 했던 일,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실감케할 만큼 그악스러웠던 여성 상사들도 결국은 유리천장 속 분투 결과 그리 됐다는 사실도. 나는 그들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고, 그렇게 페미니즘이란 유일무이하게 나의 지적자극의 대상이 됐다.


문화부 생활도 끝이 보이던 2020년 말, 기자를 그만 둬야 하나 그렇담 페미니즘을 공부하러 여성학 대학원에 가볼까 하던 찰나 나에게 제안이 왔다. 회사 편집국 바깥의 일종의 부설기관으로 있던 젠더연구소에서 기자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거였다. 세상에, 젠더가 나와바리라니. 그 즈음 내가 담당하던 분야인 문학도 영화도 페미니즘이 대세라 하루가 멀다하고 페미니즘 관련 기사를 쓰면서도 목마름이 짙었던 나에게 모처럼 솔깃한 제안이었다.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 같은 기존의 언론사 편제에서 벗어나, 젠더라는 관점 자체가 출입처라는 것도 맘에 들었다. 거기서라면, 좀더 기자로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황홀한 제안이었고, 단박에 승낙했다.


그러나 인사가 임박한 시점, 내가 다시 들은 얘기는 전혀 다른 뉘앙스였다. "편집국에 결원이 많기에, 너를 전적으로 젠더연구소에 보낼 순 없다. 사회정책부로 가서 정부 부처를 출입하는 일을 메인으로 하고, 젠더연구소는 겸직으로 해라."


직장인이라면 다 안다. 겸직이란 말의 뜻을. 일을 하다보면 본직도 다 처리하기가 힘든 게 현실인데 언제 겸직의 일을 하겠는가. 겸직은 이른바 '가욋일'이 되기 쉽상이고, 그것은 법정 근로시간인 주 52시간을 초과해서 나의 열정페이로나 굴러가는 일이 될터였다. 둘다 회사의 일임에도, 겸직 일을 하자하면 본직 부서의 부서장에게 없는 눈치 있는 눈치 다 봐야지... 결국엔 본직 일이나 꾸역꾸역 처리하면 다행한 삶이 되리라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이후 나는 2022년 여성가족부가 '폐지 논의'를 주도할 조직을 발족한 이후 단장직을 겸임으로 임명한 것을 두고 칼럼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직장인이면 다 안다. ‘겸임’이라는 말의 느낌적인 느낌을, 구실적인 구실을, 한계적인 한계를.'이라고. 내가 봐도 좀, 날이 서 있었다.)


내가 강하게 반발하자, 위에서 내놓은 새로운 제안은 "그럼 당장은 코로나 이슈가 급하니 세 달 정도만 코로나 기사를 쓰고, 이후엔 여성가족부를 출입하며 젠더연구소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당장 인력이 급한 데스크로서는 고육지책이겠지만, 나로서는 한순간에 '땜빵 인력'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실제 언론사에서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루틴한 큰 행사, '대통령 탄핵' 같은 전대미문의 일이 생겨 담당 부서에서 다 처리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파견' 형식으로 다른 부서의 인력이 가서 일을 돕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젠더연구소는 겸임 기자만 여럿 있을 뿐 전임은 사원급 한 명과 소장이 전부인 초소형 조직이었다. 전임 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내가 겸임으로 타부서 일을 같이 하게 되면, 사실상 젠더연구소에서 일하는 인원은 소장 한 사람이 된다. 기왕에 젠더 이슈를 선도적으로 다뤄보자며 조직을 만들어 놓고, 역시나 신문사에선 기존의 '정경사'(정치부·경제부·사회부)를 우선시하는 태도에 화가 불같이 났다.


결론적으로는, 나는 젠더연구소가 아니면 퇴사를 할 사람이었기에 더욱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원 A는, 결국 폭탄선언을 했다.


"(젠더연구소) 전임이 아니면, 그만 두겠습니다."


눈물과 함께 콧물이, 콸콸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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