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슬기 Mar 16. 2023

퇴사를 피하고 싶어서 1

퇴사가 벼슬은 아니지만 5

 젠더연구소의 10개월은 더없는 호시절이었다. 내가 쓰고 싶은 기사를 맘껏 쓰면 되었고, 쓰기 싫은 기사는 하나도 없던 희귀한 시간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재택근무도 잦아서 워라밸은 극상에 달했다. 내가 언제 퇴사를 꿈꿨나 싶게, 몸도 마음도 따땃한 계절에 볼멘소리는 쑥 들어갔다.


 마음이 안정되고, 눈에 들어온 것은 주거 문제였다. 14년 전, 서울로 유학을 온 이래 나는 늘 주거가 불만이었다. 15년 간 열다섯번의 이사를 거듭하며, 나는 갖가지 주거를 다 경험했다. 2인 1실 기숙사, 외부 창문이 있는 고시원, 외부 창문이 없는 고시원, 원룸, 친구집, 분리형 원룸, 투룸 등. 내 고향 진해에서 경기도로 이사온 부모님을 따라 잠깐은 부모님 집에 기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한 지 10년 세월이 흘러, 내 가족까지 한 마리 데리고(나는 2015년에 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했다.) 원가족과 함께 사는 일은 보통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시계가 나의 고3 시절에 멈춰 있는데 반해, 나의 시계는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으니까.


 잦은 이사도 힘들었지만,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주거의 질도 문제였다. 아니, 실상 주거는 나아졌으되 어느덧 굵어진 나의 머리만큼은 따라잡질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신축 원룸이나 투룸 등은 반려동물 거주에 관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늘 20년 이상의 구축 다가구주택만 찾아다녔다. 주거의 질이 좀체 나아지지 않는데는 늘 퇴사를 예비한 나의 삶에도 원인이 있었다. 언제든 때려치우고 떠날 수 있는 홀가분한 몸과 마음을 지향했기 때문에, 나는 그 흔한 전세 대출 하나 받지 않았다. 빚으로 회사에 묶인 느낌을 받기 싫어서였다. 그래서 늘 내가 찾는 매물은 반전세이거나 월세였고, 그나마도 혹여나 있을지도 모르는 퇴사에 대비해서 매달 드는 돈을 단출하게 만들기 위해 저렴한 집을 찾아다녔다. 내가 사는 집은 정말로 좋아지기 어려운 형국이었다.


 젠더연구소에 있던 그 기간 나의 살던 집은 나의 불만이 총체적으로 폭발하는 곳이었다. 보증금 7000만원에 매달 30만원을 내는 반전세 형태의 그 집은 동작구의 25년된 다가구 주택의 투룸이었다. 크기도 10평 정도 됐겠다 작지 않았고, 나의 소중한 고양이까지 받아준 귀한 집이어서 처음에는 감지덕지했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면적을 넓혀가던 천장과 외벽으로 난 창틀의 곰팡이(락스물 등 여러 방편을 동원했으나 끝끝내 이별하는덴 실패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던 화장실과 싱크대, 화장실에 잇닿은 다용도실의 펄럭거리는 문 때문에(나의 머리로는 좀처럼 닫을 수 없었다) 샤워를 하는 내내 춥던 기억까지... 마침내 인내심이 폭발한 것은 아래층 사는 주인장이 붙여둔 한 떨기 포스트잇 덕이 컸다. 수도세를 사람 수대로 N분의 1로 계산하던 그 집에서 우리집 고양이도 당당히 사람 1명 몫으로 계산해야 한다는 게 주인장의 논리였다. 어찌 생각하면 동물권이 제고됐다고 봐야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집 고양이는 샤워도 잘 안하고요. 물은 삼다수만 먹는데요...

 

 거기에 무리한 요구를 하던 여러 주인집에 대한 증오도 하늘을 찔렀다. 지금 집 주인은 내가 이사오기도 전 계약 단계에서부터 부동산을 통해 "적금 만기가 좀 남아 자금 융통이 어려운데, 아가씨가 돈을 좀 빌려주면 곧 나갈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원활하게 돌려줄 수 있다"며 돈을 꿔달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직전 집 주인은 "나는 아가씨 보증금이 1000만원인 줄 알았다"(실은 2000만원이었다)며 자금 융통의 어려움을 호소해 퇴거하는 그 날까지 머리를 곤두서게 하는 인물이었다.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다른 주인집은 있는 듯 없는 듯 5년 이상 집세를 올리지 않거나(이건 좀 드물긴 했다), 보증금가지고 퇴거하는 날까지 X줄 타게는 안 하던데.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닥치나 싶어 하늘을 많이 원망도 했다.


 천사같은 집주인을 둔 친구들은 나를 이해 못했지만, 바로 이 지점이 내가 내 집 마련의 꿈을 부글부글 불태우게 된 이유였다. 동작구 투룸의 벽과 바닥의 곰팡이가 한 뼘 자랄 때마다, 그걸 가리기 위해 엄한 러그를 벽에 걸었지만 결국은 러그 면적을 넘어서서 자란 곰팡이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나는 더욱 투지를 불태웠다. 


 그 즈음 내 생각에, 주거를 발빠르게 개선시키는 방법은 다름아닌 결혼이었다. 나는 그 즈음 만나던 애인에게 '하우스 메이트를 원한다'며 용감하게(혹은 무모하게) 결혼하자는 얘기를 했었다. 너와 나의 돈을 합쳐 집을 샀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주거에 관한 나의 불타는 니즈와 애인의 느슨한 니즈는 좀처럼 결합할 줄을 몰랐고, 나는 이내 결혼 준비에 싫증을 느꼈다.  2022년 발렌타인데이 즈음, 그와 나는 결국 헤어졌다. 애시당초 사랑보다 집을 우선했던, 나에게 문제가 컸을 것이다.


 그러고 평정을 되찾은 줄로만 알았던 나는, 실은 나를 얕본 셈이었다. 이별 후, 집에 관한 나의 집착은 더욱 불타올랐다. 애당초 집을 위해 결혼을 생각하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어차피 결혼은 날아갔으니 심플하게 '집'이라는 최종 목표 자체에만 집중하면 되지 않겠느냐, 는 게 내 생각이었다. "정말로 혼자서는 집을 못 사?" 매일매일 호갱노노와 네이버 부동산 같은 부동산 어플을 들락거리며 내가 이빠이 대출을 받는다면 살 수 있는 집이 정말 없는 것인지 검색에 검색을 거듭했다.


 그 즈음은 회사일이 안정화되면서, 퇴사욕이 사그러들었기에 대출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상쇄된 상태였다. 그래, 내가 결국 회사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면… 회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지인 대출을 왕창 받는 것이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대출을 받으면, 퇴사욕이 더욱 감퇴하겠지' 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 즈음 같이 전세 임장을 돌다가 들었던 엄마의 힐난, "그 나이 먹도록 모은 돈이 그거 밖에 없냐"는 말도 나의 불같은 성정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엄마와 격렬한 다툼을 벌이고, 근 두 달 간 연락을 두절했던 그 해 늦겨울 나는 일을 벌였다. 일만 끝나면 부리나케 고양으로 달려가 아파트 매물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내가 가진 돈으로 가능한 서울 부근의 아파트는 그곳밖에 없었다.) 발품 파는 오프라인 임장과 함께, 여러 부동산 서적을 구입하고, 집 매매 A부터 Z까지 가르쳐주는 동영상 강의도 살뜰히 들었다. 뼛속까지 문과인 내가, 숫자가 나오는 공부가 재밌다고 느낀 건 간만이었다. 그 시절 엄빠와는 연락을 끊고 살았기 때문에, 내가 의지할 것은 먼저 집을 산 신혼의 친구들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임장을 함께 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혼자서 진짜로 격렬하게 고양 시내를 누볐다.


 그렇게 근 한 달여만에, 나는 덜컥 집 계약을 해버렸다. 고양에 위치한 19평짜리 구축 아파트. 회사가 있는 광화문까지는 광역버스 한 방에 45분이면 도착한다는 그 곳. 친구가 근처에서 신접 살림을 차려서, 내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뻔질나게 고양의 아파트를 들쑤시고 다녔건만, '이게 내 집이다' 하는 느낌은 없었었는데 일대에서 최고가에 나와있던 그 집은 발을 들이는 순간 알았다. "이게 내 집이구나. 모든 게 아름다워." 신혼부부가 매입하며 본인들 거주용으로 해놓은 리모델링이 살뜰히 예쁜 집이었다. 계약금을 많이 부치는 조건으로, 호가보다는 천만원 싸게 그 집을 계약했다. 인생 최고의 소비, 손을 달달 떨며 그 집을 계약하던 다음 날, 나는 장렬하게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 해 5월 말, 날씨도 따땃하니 좋던 날 나는 이사했다. 몇 주 전 나의 매매 소식을 듣고 까무러쳤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던 엄빠와 함께였다. 이사하던 날, 대출 실행과 함께 잔금을 치르기로 돼 있었기에 나는 전날 자기 직전 부지런히 머리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러나 막상 이사 당일, 이삿짐 센터 아저씨부터 약속을 펑크 내서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됐다) '인생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구나'를 절감하며 엄빠 앞에서 매사 의연한 척, 처리해나갔다. '설마' 싶었던 대출 실행도 원활히 진행되고, 서류 정리를 다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처음 갖는 내 집으로. 그리고 그 집은 누가 봐도 부동산 버블의 끝에 산 집이었기 때문에… 우리 동네 최고 실거래가를 지금껏 찍고 있다…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집 계약을 하던 당시 나는 일종의 '조증' 상태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넘치는 체력과 집중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상투' 잡은 셈이지만, 사실 알고도 잡은 상투이기도 했다. 내가 집을 안 사면 회사로 인해 받는 고통을 반까이(?) 할 수 없겠구나, 나는 그렇게 집이 중요하게 길러진 사람이구나, 집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매번 연애를 하며 상대에게 그런 고통을 안기겠구나… 누군가에게는 궤변이겠지만, 나에게는 그 시절에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내 집에서 보내는 나날이, 나날로 행복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나의 새 집에 처음 오던 날 내 꼬맹이.

   

작가의 이전글 퇴사운을 보려고 타로를 배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