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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Mar 27. 2023

퇴사를 피하고 싶어서: 2묘 가구의 가장

퇴사가 벼슬은 아니지만 7

나는 1인 2묘 가구의 가장이다. 각 8세와 3~5세로 추정되는 서울과 도울 형제와 함께 산다.


도울(왼쪽)과 서울. 침대 붙박이들이다.


지난해 9월 말, 약 1년 9개월 가량의 젠더 담당 기자 노릇을 마치고 국제부로 발령이 났다. 달가운 인사는 아니었다. 젠더 기자를 더 하고 싶어서, 계속해서 여성가족부만 더 출입할 수 있다면 사회부 사건팀에서 경찰서를 같이 마크하면서 하겠다고 '소원수리'를 썼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 직장인이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제 직장인 더 하기가 싫다...


그런 마음이 모락모락 들 무렵, 그래서 엄마한테 '나 유학이나 갈까' 하며 진반 농반으로 주절거렸다. 그 말이 엄마의 마음을 어지럽혔나 보았다. 그쯤부터 엄마는 웬 검은 고양이의 사진을 가족 단톡방에 부지런히 뿌렸다. 윤기가 좌르르한 까만 털에 닥스훈트처럼 몸통이 길고, 연둣빛 눈이 반짝반짝하는 애였다. "얘가 우리 동네에 길냥인데, 지나다니는 사람 다 따라다닌다" 부터 시작해서 "아무한테나 앵기는데, 누구한테 발로 차이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에서 "오늘 캔 하나 따주고 왔는데 앉은 자리에서 다 먹더라" 까지. 원래가 동네 캣맘으로 유명하던 엄마지만, 그렇게 부지런히, 그것도 한 마리의 안부만을 올리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느날부터는 내가 먼저 묻기 시작했다. "걔는 잘 있음?", "오늘도 캔 먹었음?", "애가 성격이 좋은가부네…"


엄마가 맨 처음 보내온 검은 고양이의 사진. 아이는 동네를 활보하며 보는 사람들의 가랑이 사이로 족족 걸어다녔다고 한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엄마는 내 의사를 적극적으로 타진해오기 시작했다. 이젠 카톡이 아니라 전화로였다. "아니 걔가 하도 성격이 좋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다 따라 다니는데… 그러다 이상한 사람한테 해꼬지 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로 시작한 통화는 "니 집 넓은데 서울이 혼자 두면 뭣할거고. 서울이도 니없음 하루종일 심심타. 둘째 하나 들이는 거 어떻노"로 이어졌다.(나는 2015년 3월부터 '서울'과 동거 중이다.) "내가 두 마리 키울 정신이 어딨노?"하면 "나도 니 전세 살거나 하면 권하지도 않는다. 니 집이니까 이제 괜찮다. 좋은 일 하는 셈치고 한 마리 더 키워라"가 더해졌다. 그러면 "에이, 안 된다. 지금도 털 감당 안 된다"며 맞대응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던 10월 2일, 어느 비오던 월요일이었다. 엄마가 제법 고용량의 영상 하나를 단톡방에 올렸다. 꽤 긴 시간을 걸려 다운을 받았다. 예의 그 까만 고양이가, 본가의 안방에서 사지를 동서남북으로 펴며 뒹굴거리는 영상이었다. 제 집 안방인가 싶게 아무 거리낌도 없어보였다.


"엥, 뭐고?"

"비가 와서… 비 쫄딱 맞고 차 밑에 들어가 있는거 데려왔다 아이가. 그냥 손으로 들어올려서 데려오는데도 아무 저항 안하더라. 비 맞는 걸 어찌 가만히 볼 거고."

"우짤건데? 엄마 고양이 알러지 있다 아이가."

"우짜긴? 니한테 보내야지."


그러니까 엄마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유학 드립'에서 시작됐음은 사고 회로를 별로 돌리지 않고도 짐작 가는 일이었다. 엄마는 '설마 고양이 두 마리나 데리고는 유학 가진 못하겠지, 퇴사 하진 못하겠지' 하는 마음에 지금 업둥이를 나에게 보내려고 하는 거였다. 물론 사람을 무척이나 따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유기된 것으로 보이는 냥이가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겠지만.


다음날, 정말 거짓말처럼 그 까만 냥이는 우리 집으로 왔다. 엄빠의 차를 타고. 냥이는 집 앞 동물병원에 들러 기초적인 검사부터 받았다. 중성화를 한 수컷 냥이이며(그 표식으로 왼쪽 귀 끄트머리가 잘려 있었다), 수술을 한 지 얼마 안됐는지 실밥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이는 3~5세로 추정이며, 비교적 건강한 편이라고 했다. 무턱대고 합사를 하면 냥이 둘다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므로 격리시켰다가 2~3일쯤 후에 살림을 합치라고 했다.


병원 검진 후 엄빠가 가고… 검은 냥이가 든 이동장과 새 냥이 살림을 잔뜩 짊어지고 내 집으로 올라왔다. 언제나처럼 나를 맞이하려 현관으로 달려오다 낯선 놈의 냄새에 하악질을 시작한 서울이를 뒤로 하고 작은 방으로 급히 몸을 피했다. 거기엔 새 냥이를 위한 화장실과 사료, 물 그릇 등을 준비해뒀다. 이동장을 열었더니 검은색 발이 불쑥 나왔다. 집으로 와서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맣고 덩치가 제법 큰 것이, 한 마리 퓨마 같은 자태였다.


그 날의 두 집 살림은 뭔가 치열한 데가 있었다. 문 밖에서는 침입자의 냄새를 맡은 서울이가 연신 하악질을 시전했다. (서울이는 동물병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 하악질을 않는 아이다.) 검은 냥이는 자신을 향한 하악질의 정체를 알고 싶은지 문을 향해 연신 '아울'거렸다. 나는 새 식구에게 고심 끝 '도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돌림자를 좋아하는 내 취향과 함께, 남과 함께 스스로를 돕는 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한자도 있다. 건널 도(渡), 답답할 울(鬱). '답답함을 건넌다'는 뜻이다.


작은 방에 격리된 도울. 밖에서 들리는 서울이 하악질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이름답게, 이름처럼 그날 도울이는 작은방 문턱을 곧장 건넜다. 그 좁은 방에서 하도 울어서 내가 감당이 안됐던 탓이다. 울음소리가 남성 바리톤처럼 굉장히 중후한 맛이 있었다. 예상대로 터줏대감 서울이는 저러다 목이 쉬지 않을까 싶게 시종일관 하악질을 해댔고… 도울이는 '묘생 2회차'가 아닌가 싶게 유유히 집안을 돌아다녔다. 서울이에게 새삼 미안하고(서울아, 미안해. 나도 할머니한테 당한거란다…) 도울이에게는… 뭐랄까. 딴 것보다도 도울이를 보면 웃음 먼저 뛰쳐나왔다. 낯선 곳에서 이유 없는 적의 앞에서도 태연자약한 그 모습에.


이로써 억대의 주담대에, 2묘의 양육까지 어깨에 짊어진 나는… 명실상부 우리 동네 대표 가모장이 되었다. 2묘 가구의 가모장이 된다는 것은 쉬이 직장을 때려치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엄마가 도울이 얘기를 부릉부릉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크게 잔말 않고 엄마의 제안(아닌 떠넘김)을 받아들인 이유이기도 했다.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려면 건식·습식 사료에 영양제에 츄르에 화장실용 모래까지 드는 돈이 얼만데! 다니던 직장이나 열심히 다녀라 집사야!


도울이가 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안방 붙박이장에 들어가 1묘 시위를 벌이던 서울이가 침대로 내려왔다. 그리고 자다 깬 아침 나절, 둘이 내 발치에서 열렬히 그루밍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눈까지 그윽하게 감고, 서로 상대의 턱을 핥아주는데 나로서도 처음 보는 듯한 서울이 표정에 놀랐다.


도울(왼쪽)과 서울. 역사적인 첫 코 뽀뽀의 현장.


첫 아이를 낳던 때의 간난신고를 잊고 둘째를 갖는 부모들의 마음이 이럴까 싶게 입양 전 망설이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두 마리의 노는양을 그저 쳐다만 보는 것으로도 행복해졌다. 그 즈음은 두울이 형제의 뽕으로 인사 발령에의 스트레스 등을 다소간은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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