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슬기 Mar 29. 2023

날카로운 옛 퇴사의 추억들

퇴사가 벼슬은 아니지만 8

 퇴사욕이 욱, 하고 올라올 때마다 묵주 매만지듯 매만졌던 과거 퇴사의 기억들이 있다.


 지난해 말 9년 다닌 언론사를 퇴직하기 이전에도 나는 도합 세 번의 퇴사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알바는 예외로 치고, 인턴과 정규직 포함이다. 


 첫 퇴사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진행됐다. 다름 아닌 일터가 없어졌기 때문에… 잔여 학기를 한 학기 남기고 휴학했던 나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국회의원실 인턴이 되었다. 나는 정치외교학 전공이었고, 내 전공이 실물로 펼쳐지는 영역인 국회를 어떻게서든 들여다보고 싶었다.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은, 국회 인턴이 되는 거였다.


 열다섯번 정도 문을 두드린 끝에 한 의원실에 들어가게 됐다. 처음 들어갔을 때 나는 직속 상사인 비서님을 오빠라 부를만치(...) 철이 없었다. 청바지에 워커 차림으로 출근했다가 "우리 방엔 청바지 없어"라는 말을 듣고 로엠에 가서 투피스와 원피스를 30만원 어치 사제끼기도 했다. (인턴 월급 120만원에 옷값 30만원은 너무 출혈이 큰 지출이었다.) 얼렁뚱땅 축사도 쓰고, 법안도 발의하고, 청문회 질의서도 쓰며 지냈다. 우편물을 정리하고, 전화를 돌리는 등 의원실 막내로서 잔심부름을 하는 건 기본이었다. 첫 사회생활치고는 굉장히 롤(role)이 커서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벼인턴의 야무진 입매가 돋보이는 당시 국회 출입증.


 그러나 그것은 불과 23일만에 끝을 고하게 됐다. 우리방 영감님(의원실에서는 자신들 방 의원을 그렇게 부른다)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벌금 1200만원 형이 확정되며 의원직이 상실됐기 때문이었다. 대법원 선고가 나오고 불과 30분 만에 국회사무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언제까지 방 빼실 건가요?" "아… 상의해보고… 말씀드릴게요." 조용히 방의 문을 닫으려는데 별 일면식이 없던 옆방의 타당 의원님이 와서 "인생 살다보면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모른다"며 일장연설을 하고, 같은 당의 여러 의원님들이 와서 "막내는 어떡하냐"며 나에게 안쓰러움이 섞인 눈빛으로 악수를 권하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나는 이제사 막 하이힐과 부담스럽게 엉덩이에 낑기는(낑긴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펜슬 스커트에 적응이 막 된 상태였다.


 이후부터는 다시 청바지와 워커의 시대였다. 청바지에 워커를 신고, 의원실로 출근해 하루종일 우체국에서 박스를 사들이고 테이프질을 해서 방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당시만 해도 밥벌이를 건 일자리는 아니었으므로, 참담하게 슬프기보다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국회에서는 이렇게도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구나, 그렇구나… 반면 방안의 선배들은 거취 문제로 다소 심경들이 복잡했던 거 같다. 그러던 와중, 막내였던 내가 제일 먼저 취업이 됐다. 학교 선배가 다른 방(의원실)으로 적극 천거(?)를 해준 덕이었다. "저 다음주부터 XXX 의원실에 출근하게 될 거 같아요!" 다들 짐을 싸는 와중에 철없이(나이의 문제로만 탓하기에는 너무도 뇌가 청순했다) 기쁨에 들떠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의원실 분들은, 다들 한마음으로 축하해주셨다.


 그러고 출근한 두 번째 의원실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직전 방에는 그래도 같이 들어간 또래의 인턴 오빠가 있어서 서로 의지가지 할 수 있었는데 새 방에서는 나만 나이가 똑 떨어지게 어려서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23일간 국회를 경험했다는 이유로 방에서는 다소간 기대하는 바도 있으셨던 것 같지만… 거기에 부응하기에 나는 지독히도 어리고 어설펐다. 두 번째 방에서도 축사 쓰고 법안 발의하고 전체회의 질의서 쓰는 일과 함께 손님 응대(인턴의 자리는 꼭 문간이다)와 잔심부름 등을 했다.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는 지역구에서 오는 국회 견학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을 했다. 서울서 비교적 가까운 지역구였던 두 번째 방에서는, 지역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노인정 등에서 자주 국회로 견학을 왔다. 그들을 맞이하는 일은 나와 비서관님의 몫이어서, 애기들을 데리고 국회 잔디밭과 국회 박물관 등등을 오가며 "첫 번째 대통령 할아버지는 이승만…" 부터 시작되는 일장연설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답답한 사무실서 벗어나 눈이 땡글한 애기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었지만, 그렇게 애기들이 한바탕 놀고 간 후면 사무실에서는 미친듯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해 9월, 복학을 세 달 여 앞두고 나는 의원실에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스텝이 좀 꼬인 것이… 나를 그 방에 추천한 선배가 "얘는 (국회에) 말뚝 박을 애"라고 한 상태여서, 나의 퇴사 전언은 그 방 비서관님이나 보좌관님으로서는 뜨악한 일이었다. 물론 남은 학점이 많지 않아서, 의원실에서 조금만 배려를 해주신다면 학교를 다니면서도 일은 할 수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나는… 하루빨리 그만 두고 싶었다. 답이 있는 글쓰기(당론이나 의원님 성향에 따라)를 하는 데 지친 탓이었다. 일만 잘 맞으면 기자 준비를 접고 투신해도 괜찮을만큼 책임과 권한이 막중한,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주장을 좀더 활발히 할 수 없다는 점이 맘에 걸렸다. 그리고 그 즈음 내 삶은 굉장히 고단했다. 30일 동안 30일 출근하는 업무 강도에(게다가 퇴근 시간은 거의가 밤 12시였다), 옆방의 전화 진동 소리, 방귀 소리가 다 들리는 좁은 고시원에서 거주하는 일도 온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복학 전에 얼른 내 고향 남쪽 나라로 가서 지친 이 한 몸을 누이고 싶었다. 두 번째 방에서 일한 지 불과 네 달만의 일이었다.


 퇴사 얘기는 직속 상관한테 먼저 드려야한다는 건, 어디서 들은 것도 아닌데 체화된 지혜였다. 둘만 일하던 어느 저녁, 비서관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고 자리를 옮겨 소파에 앉았다. "그만 두고 싶습니다" 했을 때 한숨 쉬며 머리를 쓸어올리던 비서관님 생각이 난다. "슬기씨, 이거 되게 책임감 없는 짓이야" 라고 이어서 말씀하셨던 거 같다. '말뚝 박는다'(내가 직접 말한 건 아니지만)고서는 네 달 만에 그만두는 행태에 대한 힐난이었고, 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여서 고개가 앞으로 더욱 숙여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 알았어. 보좌관님께 말씀드릴게."가 나오기까지의 시간이 천겁 만겁으로 느껴졌다.


 복학이라는 일종의 '쿠션'이 있었던 두 번의 인턴 생활을 넘어, 본게임으로서의 퇴사는 그로부터 1년여 뒤에 일어났다. 졸업하고도 1년여가 넘게 수십차례 언론사 기자 직군을 지원하면서 나는 한 번도 2차 필기시험 관문을 넘지 못했다. 기자가 글을 잘써야 하는데, 정작 글을 못 써서 계속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자괴감이 바닥을 쳤다. '뭐라도 밥벌이를 해야할텐데'라며 눈 돌린 것이 어린이 잡지의 기자직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넣었는데 1차 서류를 통과하고, 2·3차 면접도 후루룩 통과했다. (거기는 다행히 필기시험이 없었다.) 어랏?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에 기뻐하면서, 출근을 시작했다.


 분명 감격해야할 그 근무지에서, 그러나 나는 겉돌았다. 아이들 교육 콘텐츠 개발과 어려운 시사 이슈를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기사를 쓰는 것이 주 업무였던 그 곳에서 나는 '이슈의 최전선인 신문이나 방송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여기는 애들 상대하는 시시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경솔한 자괴감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별책부록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는 콘텐츠를 만들 건지를 상의하는 날이었다. 회의에 참가한 선배들이 파워포인트 등을 만들어와서는 '조선왕조실록으로 부루마블 게임 만들기', '온라인과 연동한 캐릭터를 만들어서 설명하기' 등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다. 


"이슬기씨는 어떻게 생각해?"

"아, 저는… 애들이 만화 좋아하니까, 만화로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밑도 끝도 없고, 부연 설명도 없는 저 한 줄이 내 대답의 다였다.


그 날은 회의를 마치고 바로 사수 선배한테 소환됐다.

"야, 너 다른 선배들 다 피피티며 뭐며 준비해온 거 안 보여? 너는 발표 자료 하나 없이 달랑 입으로 그게 다야?"


당시에 나의 감정은… 당혹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나를 깨는 선배한테 당혹했다기보다는, 선배들이 콘텐츠 개발에 그렇게 열심인 것에 놀랐다. 거기에 나처럼 무성의한 애가… 물을 흐리는 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본받아 더 괜찮은 어린이 잡지 에디터로 거듭날 수 있을까? 당시의 마음은 그때 막 신입 기자 모집 공고가 떴던 일간지 H사의 자소서로 치달리고 있는데. 아, 내가 여기 있는 건 회사에도 나에게도 안 될 일이로구나.


"죄, 죄송합니다. 전 아무래도 많이 모자라서요. 그만 둬야 할 것 같습니다."

"어? 너 지금 내가 너 깼다고 이러는 거야?"


당시 오후 반차를 내고 곧 고향 집으로 갈 계획이었던 선배에게는 정말 못할 짓이긴 했다. 그러나 정말 솔직한 내 심경이기도 했다. 안 되겠다, 안 되겠다. 난 정말 안 될 놈이로구나. 더 이상 민폐를 끼치지말고 여기서 사라지자… 선배는 편집장님과 얘기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비행기 시간에 맞춰 사라졌다. 그리고 편집장님은, 주말 새 부모님과 상의해보고 오라고 하셨다.(그 날이 금요일이었다.) 돌아온 월요일에 나는, 기물을 정리하고 결국 사직서를 냈다. 입사한 지… 불과 2주만의 일이었다.


그러고 7개월 뒤, 나는 S신문에 합격해 수습 기자로 회사를 다니게 됐다. 경찰서에서 먹고 자며 하루에 두 시간을 잘까말까했던 그 지독한 수습 생활 동안, 나는 내가 두 번의 국회 인턴 경험이 없었던들, 그리고 직전의 퇴사 경험이 없었던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다. 국회 인턴을 거치며 '내가 30일 동안 30번 출근도 해본 사람'이라는 일종의 노예 근성, 혹은 허황된 호기가 세 달 반 동안의 하리꼬미(수습기자가 경찰서에서 숙식하는 생활)을 버티게 했다. 그리고 직전의 퇴직 경험은 나를 벼랑 끝으로 몰면서 '이 일마저 쉽게 내던지면 안 된다'는 결기를 내게 심어줬다.


 말하자면 세 번의 퇴사 경험이 모여, 내 9년의 기자 생활을 지탱해준 셈이다. 개중 어느 하나라도 빠졌더라면 나라는 인간의 특성상 9년이나 한 회사에 다니지는 못했을 거라고, 이 연사, 힘차게, 외쳐본다...


첫 번째 인턴 생활 중 참석한 국회 토론회에서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졸음을 쫓지 못하는 벼인턴. 대략 12년 전의 사진이다.



 

작가의 이전글 퇴사를 피하고 싶어서: 2묘 가구의 가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