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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슬기 Apr 04. 2023

내가 두 번째로 사랑한 공동체

퇴사가 벼슬은 아니지만 9

이런 얘긴 무슨 소용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지만 이상하게 꼭 써보고 싶었다.  얘기를 쓰지 않으면 내가 회사를 그만 둘 당시의 기분을 다 설명할 수 없기에. 사랑한 건 사실이고, 그 사실은 내가 퇴사한 이후에도 어디 도망가지 않기에. 그 흔한 지난 사랑 얘기들이 그러하듯이.말이다.


내가 9년을 일한 언론사는, 내가 인생에서 두 번째로 사랑한 공동체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가족이고, 그 다음이다. 그곳에서, 나는 가족 다음으로 가장 오랜 시간 몸 담았다.


나란 인간은 지독한 개인주의자여서 좀처럼 공동체 소속감이 안 생기는 사람이었다. 학교야 어쩔 수 없이 다녔지만, 대학 때도 과생활과는 담을 쌓았고 자발적 아싸를 자처했다. 오래 가는 동아리나 소모임 생활 역시 못 견뎌 해서 도합 2년이면 오래 견딘 셈이었다.


그런 내가, 9년을 몸 담은 조직이 이 회사였다. 이곳이, 내가 언론사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부터 가장 선망하던 회사라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2년 백수 끝 신문 기자라는 꿈을 이뤄준 직장이었고, 특정 정치색으로 치우친 듯한 몇몇 언론사와는 달리 비교적 상식이 통하는 회사라는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그랬던 이유에는 아래위로 말이 통하는 선후배의 존재가 강력했다.


그 험했던 수습 기자 시절을, 단언컨대 입사 동기들로 이루어진 단체 카톡방이 없었던들 나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잠을 두세시간 잘까 말까 하며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던 그 시절, 눈물로 삼킨 서러움과 빡침과 서러움을 추위에 곱은 손으로 털어내던 단톡방이 없었던들... 그렇게 지독하리만치 고단한 엿새를 보낸 뒤 밤 늦게 각 구역별 경찰서에서 선배들에 마지막 보고를 하고도 각자의 인생의 짐만한 엿새치 캐리어와 침낭을 들고 24시간 하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만났다. 거기서 술 한 잔 없이도 캬페에서 수다 떨며 잘 논다는 개그맨 사교 모임 '조동아리'처럼 자몽주스 한 잔, 탄산수 한 잔에 각자의 번뇌를 쏟아냈었다. 잠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체감상 하루 18시간은 일하면서, 한 시간에 한 번 선배에게 기삿거리를 보고하면서 겪은 감정을. 한 톨 잠이 급했던 그 순간에도 우리는 만나야만 했다.


수습 때는 하늘 같이 무섭던 선배들과도, 낭만은 있었다. 나는 수습 때 일진이었던 선배와 2019년 봄, 여름 휴가를 함께 했다. 한 번은 대만, 한 번은 강원도 양양에서였다. 그 얘기가 회사에서 회자가 되며 "선배랑 휴가를 가다니 슬기가 보살이네"라는 말이 떠돌았다고 했다. 같은 반응을 나도 직접 들었는데 내 대답은 이랬다. "세월호 출장도 같이 갔는데, 그 정도야 그냥 가죠."


선배와는 세월호 참사 직후 함께 진도에 2주간 출장을 갔었다. 하루 종일 전화를 주고 받으며 각종 기사를 처리하곤, 밤이면 여관방에 파김치가 된 몸을 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선배는 먼저 일어나 다 씻고서 나를 깨웠다.  선배 덕에 나는 수습이며 후배이지만 매일 아침 잘 거 다 자고 느지막히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나중에 까닭을 물어봤더니 선배의 답이 이랬다. "아무래도 넌 수습이라 돌아다닐 일이 많아서 피곤할테고, 난 아침잠이 적으니까." 수습 기간 내내 혼도 많이 났지만, 대개는 다 적확한 이유가 있었고 매번 확실한 디렉팅을 주던 선배를 인간적으로 존경했다.


입사 3년 차로, 온라인뉴스부에서 일했을 때는 같은 부서 선후배들과 함께 정동진이 일출을 보러 갔다. 무박 2일로 왕복 10시간 이상을 기차로 달려야 하는, 생고생 여행이었다. 동해로 가는 그 시끄러운 열차 칸에서, 우리 일행이 최고령으로 보였다. 대학 저학년 때 아니면 감히 시도하기도 힘들, 무한한 체력을 요하는 여행. 아니나 다를까 내 옆에 앉은 이름 모를 여학생은 대학 2학년생이었다. 내가 앞에 앉은 선배들과 대화하는 걸 보고 그는 물었다.

"혹시... 무슨 사이세요?"

"직장 선후배예요~"

"아니, 회사 사람들끼리 주말에 일출 보러 동해를 가요?"

그 이의 놀란 눈동자에 대고 "직장에서도 충분히 이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에, 그것은 엄청난 건바이건의 세계 혹은 기적과 같은 일이기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내가 농반 진반으로 "나의 회사 생활을 1년은 늘렸다"고 말하는 사내 모임도 있다.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모임. 회사의 반페미니즘적 처사에 항의하던 내가 혼자 던지는 돌팔매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비슷한 생각을 하던 선후배들과 만든 모임이었다. 거기서 우리들은 부지런히 관련 책들을 읽고 우리의 기사에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을지를 논의했다. 주로 장탄식이 많이 나왔지만, 그마저도 혼자 쉬는 한숨이 아니어서 적잖이 위로를 받았다.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자사 기사에 대해 함께 문제를 제기해서 시정한 일도 있었다. 역시 함께 내쉬는 숨에는 힘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회사에서 만난 그렇게 저렇게 좋은 선후배들 얘기를, 나의 대나무숲 같던 옛 블로그에 올렸을 때의 일이다. 댓글이 하나 달렸다. "그냥 좋은 사람은 많아도 같이 일하는 처지에 좋은 사람은 드물어요. 그게 진짜 귀한 사람인거죠." 그 댓글을, 나는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록 오랜 친구여도, 같은 직장에서 만나 동료가 됐다면 얼굴 붉힐 일이 수십가지는 생겨날 것이다. 직장이라는 전장에서도, 내게 쏠린 일을 덜어주려는 선배, 내가 영 안 풀린다 싶을 때 여러 솔루션을 제시하며 충분히 기다려주던 데스크, 함께 기사 방향을 고민하며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동료들을 많이 만났다. 진짜 귀한 사람들을. (물론 빌런도 많았다. 차칸 사람도 빌런을 만드는 직장이라는 공간에 얼마나 빌런이 많았는지는 다만 이번 글에서는 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공간을, 그런 이들과 함께 일하게 해준 공간을 떠날 결심을 하는 일이 나에겐 자못 힘들었다. 날 잘 아는 동료들은 내게 "애사심이 크다"고 했는데, 정말이지 나는 나에게 존재하는지 몰랐던 '애사심'이란 것이 꽤 큰 사람이었다. 그 마음은 내 스스로를 부지런히 괴롭혀왔고, 그래서 내가 몸 담은 공동체가 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때 그걸 쉽사리 인정하지 못했다.


감히 회사를 사랑하게 되다니. 나처럼 개인주의자인 사람이. 세상 몰랐던 감정과의 조우는 불에 덴 듯 뜨겁고 난감하기만 했다.


입사 동기가 그려준 나의 모습. 누군가는 사진 아니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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