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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狂, 及) 사람과 만나 행복했노라

- <미쳐야 미친다>를 읽고 -

by 서서희

미친(狂, 及) 사람과 만나 행복했노라

- <미쳐야 미친다>를 읽고 -


서서희

내손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들었다.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라는 책으로 토론하는 수업이었다. 나는 <글로 세상을 호령하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 나오는 조선 선비들의 태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은 불광불급(不狂不及)의 태도였다. 한 가지에 미쳐야만(狂) 남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를(及)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의 태도였다. 즉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니 지나치지 말라면서 그런 태도를 경계하고 있었다. 책을 끝내면서 '나는 과연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다산에 대해 더 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찾아보았다. 눈에 뜨인 것이 <다산의 재발견>이라는 책이었다.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의 책이었다. 그런데 책을 빌려보니 그 책의 두께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755쪽, 5부에 걸쳐 다산의 친필과 다산 관련 서적이 사진과 글로 총망라되어 있었다. 자료가 있는 곳이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안 되면 사진이라도 찍어왔다고 하는 저자의 노력이 한눈에 보이는 책이었다. 책을 훑어보기만 했는데도 대단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론 이렇게 방대한 자료를 모은 정민이라는 사람도 존경스러웠다. 나와 동갑인 나이인데 나는 세상에 무엇을 남겼을까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조금 가볍게 접근할 책으로 찾은 것이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라는 책이다. 이 책은 1부 벽(癖)에 들린 사람들, 2부 맛난 만남, 3부 일상 속의 깨달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조선 시대 선비들의 내면 읽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1부 벽(癖)에 들린 사람들에서는 꽃만 보면 그림을 그려서 <백화보>라고 하는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책을 그린 김덕형 이야기, 옛 그림을 수선하여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인 표구에 미친 방효량 이야기,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았던 석치 정철조 이야기, 독학으로 수학, 기하학, 천문학 관련 저술을 남긴 굶어 죽은 천재 김영 이야기, <백이전>을 1억 1만 3천 번을 읽었다는 독서광 김득신 이야기, 가난 속에서도 책만 읽던 바보 이덕무 이야기, 이 외에도 박제가, 노긍 등 우리가 알아야 할 분들의 '벽'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의 벽(癖)은 그냥 버릇이 아니라 존경받을 만한 삶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이런 멋진 조상이 있었다는 점도 좋았지만 이런 분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도 존경스러웠다.

책만 읽던 바보 이덕무에 대한 저자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하지만 오늘 그가 나를 압도하는 대목은 호한한 독서와 방대한 저작이 아니다.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맑은 삶을 살려 애썼던 그의 올곧은 자세가 나는 무섭다.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만년의 별 실속 없는 득의거나, 그 많은 임금의 하사품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알아줄 기약도 없는 막막함 속에서도 제 가는 길을 의심치 않았던 그 믿음이 나는 두렵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저자의 진정성이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와닿는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2부 맛난 만남에서는 허균과 아홉 살이나 어린 화가 이정과의 우정 이야기, 세상을 끊자고 강화로 들어온 권필과 그의 명성을 사모하여 제자 되기를 자청한 송희갑과의 사제간 만남 이야기,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만남 이야기에서는 만남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야금과 거문고와 노래로 한여름밤 음악회를 열었던 홍대용과 그의 벗들 이야기, 그리고 그 연주의 아름다움에 반해 연장자인 김용겸이 엎드려 절을 했다는 이야기에서는 조선 시대에도 그런 풍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가난 속에서도 돈을 꿔 달라는 짧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박지원의 편지글들 속에서는 비유적으로만 표현하고 '돈'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는 그 기발함에 놀랐다. 또 아내가 보낸 치마를 잘라 그 위에 아들과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었다는 정약용의 이야기에는 고생만 시키는 가족에게 미안해하는 다산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세 살 어린 나이에 홍역을 앓다 마마로 죽은 막내아들 '농(農, 어지러운 세상에 글 배워 우환을 만들지 말고 그저 농투성이 농사꾼으로 사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이 못내 가슴 아팠던 아버지는, 뒤에 천연두를 치료하는 방법을 정리한 <마과회통>이란 책을 지어 안타까움을 달랬다. 절망을 극복하는 다산다운 방법이었다." 라고 하는 저자의 말도 정약용의 성품을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었다.

3부 일상 속의 깨달음에서는 담배에 관한 이옥의 <연경>과 박지원의 <관재기>가 소개되고 있는데 불교적인 선문답도 흥미가 있었다. 이덕무와 정약용의 그림자놀이에 관한 글 속에서는 그림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독창적인 생각들을 만났다. 홍길주의 이상한 기행문에서는 같은 사람들과 떠난 두 번의 여행을 말하면서 같은 듯 같지 않은 여행을 말하고 있는데 그런 비교를 통해 글 쓰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니 글 쓰는 직업을 갖고자 하는 내가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글인 것 같았다. 유배당하기 전의 정약용을 만날 수 있는 <유세검정기>와 <유천진암기>와 <유수종사기>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우리가 아는 유배지에서의 정약용이 아닌 생동하는 삶을 살았던 시기의 정약용을 접할 수 있어 신기했다.

"나는 이 글을 읽다가 마른 우레 쿵쿵대는 찜통더위 속에서 엉뚱하게 세검정으로 달려갈 생각을 하는 다산의 그 마음자리를 그리워한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그의 안목이 부럽다. 절정은 미리 알고 기다린 자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절정인 줄 알았을 때는 이미 늦는다. 속인들은 언제나 버스가 다 지나간 다음에 난리를 치지만, 지혜로운 이는 천기를 먼저 읽는다."

독자로 하여금 한걸음 더 다산에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평가이다.

이 책은 하나하나의 글이 재미있어서 푹 빠져들었던 것도 있지만 미치지 않고는 모을 수 없는 방대한 자료와 해박한 지식을 쉬운 말로 풀어쓴 글을 접하면서 조선시대 선비들만 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연구하고 책 속에서 그들을 새로이 창조해 낸 저자도 미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도 미쳤기(狂)에 미칠(及)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나도 무언가에 미친 듯이 푹 빠져 행복해지고 싶다. 또 많은 분들과 이런 행복을 함께 하고 싶다. 그러려면 이 책을 읽으시라고 권해 드린다.


*2017년에 도서관 수업을 하면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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