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적지를 돌아보는 기회를 얻었다. 1박 2일 동안 동화, 동시, 청소년 소설 등을 쓰는 작가들, 관계자분들 30여 분과 동행하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에 대해 널리 알리기 위해(아동 및 청소년 대상 문학 작품으로 완성되길 바라는 뜻) 마련한 행사였다.
1일 차에는 빌레못굴과 하가리 연화지, 비학동산과 영모원, 곤을동 마을을 갔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그 당시 제주도민의 10%인 3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나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는 삼일절 기념집회가 있었고 집회 후 시가행진을 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가두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어린이가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사고에 항의하는 민간인들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후 이 사건을 항의하는 민. 관 총파업이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려온 미군정청에 의해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 취조, 고문하였으며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검거된 사람이 무려 2500명이 구금되었다고 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의 경찰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경찰과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여 다수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좌우익 간의 투쟁, 중산간 마을 소개령, 계엄령 선포 등등 일련의 과정에서 무차별 총살을 자행하고 마을을 불질렀으며, 화를 피하기 위해 숨은 사람들을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고 그 가족들을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지어 죽이거나 잡아갔다고 한다.
50여 년 동안 4.3은 제주도민에게 금기어였으며 슬퍼도 슬퍼할 수 없는 세월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2000년 1월 12일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어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진상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제주 4.3 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제주 4.3을 너무나 단순화한 것이고 세세한 것을 들여다보면 정말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빌레못굴이다. 빌레못굴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제주 빌레못굴은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와 민보단이 합동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전에 의해 동굴이 발간되면서 이 속에 숨어 있었던 애월면 어음·남읍·장전리 주민 29명이 집단 학살당하였고 동굴 속에서 나오지 못해 굶어 죽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또 다른 어머니와 딸 4구가 발견된 비극의 현장이다. 토벌대는 전날(1949년 1월 15일) 봉성리 구월동이 무장대에 의해 습격을 당한 후 토벌대와 민보단이 대대적인 수색을 벌여 빌레못굴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 당시는 겨울이어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동굴 입구를 찾은 토벌대는 굴속에 숨어 있는 주민 29명을 집단 총살하였다. 또한 남자아이의 발을 잡고 휘둘러 돌에 메쳐 죽이는 참혹한 일도 일어났으며, 이 아이의 어머니와 젖먹이 여동생은 동굴 안으로 깊숙이 숨어들었다가 어둠 속에 길을 잃어 굶어 죽은 시신도 1931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빌레못동굴 탐사반에 의해 발견되어 유족에게 인도되었다. 이 빌레못굴은 총길이 11749m로 세계 최장의 용암동굴이며, 천연기념물 3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빌레못굴은 너무 거칠고 험하여 지금은 개방하지 않고 있다. 창살로 가려진 입구는 아주 좁아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공간이 나온다고 한다.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고려 시대 산적들의 집터였다고 하는 하가리 연화지였다. 지금은 육각정이 세워져 있고, 연꽃과 수련이 자라고 있으며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세 번째로 방문한 곳은 비학 동산과 영모원이다. 개수동 비학 동산 팽나무 및 그 앞 밭이라는 안내판에는 <개수동 비학 동산 앞 밭은 1948년 12월 10일 마을을 포위하고 들어 온 토벌대가 개수동 주민과 소개민들을 모아놓고 그중에서 36명을 선별하여 학살한 곳이다. 이날 토벌대는 남편이 없는 임산부 1명을 끌어내 팽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대검으로 찔러 학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마을 사람들은 당시 기억을 지우고 싶어 비학 동산의 팽나무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팽나무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는 마을 어르신의 체험담을 들었는데, 어르신 할아버지께서 당시 하셨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이제까지 국문(중죄인을 신문하던 일)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었다."라고... 이 어르신이 마을 사람들과 뜻을 모아 영모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영모원은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곳으로 4.3 희생자를 위한 <4.3 희생자 위령비>뿐 아니라 항일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위국절사 영현비>,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호국 영령 충의비>까지 세워져 있다. 이 마을은 그동안 개인적으로 연좌제로 피해를 입는 일이 많았는데, 이런 연좌제는 마을에도 해당되어 그동안 하귀라는 이름을 다른 이름(하군동 등)으로 바꾸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 간의 화해와 상생의 의미로 하귀라는 이름도 찾고 영모원도 건립했다고 한다.
네 번째로 간 곳은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이다. 곤을동 마을은 언제나 물이 흘러 농사가 잘 되는 땅이다. 곤을동은 몇 개의 마을로 나뉘는데, 안곤을은 별도천에 의해 나뉘는 마을로 별도천에 물이 넘치면 고립되는 마을로 22가구 정도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잃어버린 마을(곤을동) 안내판에는 <곤을동은 제주시 화북1동 서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이다. 4.3이 일어나기 전, 별도봉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안곤을’에는 22가구, 화북천 두 지류의 가운데였던 ‘가운데곤을’에는 17가구, ‘밧곤을’에는 28가구가 있었다. 곤을동이 불에 타 폐동이 된 때는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이었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께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곤을동을 포위했다 이어서 이들은 주민들을 전부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 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고, 안곤을 22가구와 가운데곤을 17가구 모두를 불태웠다. 다음날인 1월 5일에도 군인들은 인근 화북초등학교에 가뒀던 주민 일부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디밑(?)’에서 학살하고, 밧곤을 28가구도 모두 불태웠다. 그 후 곤을동은 인적이 끊겼다. 제주시 인근 해안마을이면서도 폐동이 돼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이 된 곤을동에는 지금도 집터, 올레(집과 마을길을 연결해주는 작은 길) 등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4.3의 아픔을 웅변해주고 있다.>고 적혀 있다.
제주도에는 여섯 군데의 제주 4.3길이 있다. 제주 안덕 동광마을, 제주 남원 의귀 마을, 제주 조천 북촌마을, 제주 한림 금악마을, 제주 표선 가시 마을, 제주 오라동 마을 등이다. 제주 4.3길은 4.3 당시 사람들의 두려움의 기억과 생존을 위한 흔적이 남아 있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길이라고... 화해와 상생으로 4.3을 해결해 온 제주인의 노력을 알리고자, 제주 4.3길에서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 아름다운 제주도와 4.3의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만들었다고 한다.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제주 4.3길을 걸으며 제주 4.3 사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길 권해 본다.
* 2일 차는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