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곡밥과 나물
나는 대보름이 다가오면 어머님이 해주시던 오곡밥과 나물이 생각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게 된다. 집에서 말린 표고버섯, 고구마순 등을 찾아놓고 동서가 제주도에서 사다준 고사리, 작년에 쓰고 남은 말린 가지, 양구 세달살이를 할 때 보내준 양구 시래기도 준비한다. 모자란 것은 농수산물시장에 나가 사 온다. 호박고지, 시금치, 무, 찹쌀과 팥을 사고, 콩은 어머님이 남겨주신 것(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고추장, 된장, 콩, 깨, 매실 등이 남아있다), 수수나 조는 작년에 쓰고 남은 것 등등...
대보름 전날이면 어머님은 저녁에 오곡밥과 나물을 준비해 먹게 해 주시고, 대보름날 아침이면 일어나자마자 무 한쪽을 주면서 씹어라, 그리고 아침에 귀밝이술을 한 잔씩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어머님이 해 주시는 걸 그냥 맛있게 먹었다. 오곡밥이나 나물을 하면 어머님은 우리 식구만이 아니라 딸네, 작은아들네, 두 며느리의 친정어머님들까지 챙겨서 보내셨다. 그러려면 오곡밥과 나물(종류별로...)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지금 나는 어머님이 하시던 양의 반 정도밖에 안 하지만 그것도 일반 가정의 음식보다는 정말 많은 양이다. 그래도 그렇게 넉넉히 해야만 많은 사람들(15명 내외)이 먹을 수 있다.
오늘도 하루종일 아홉 가지의 나물을 무치고 볶았다. 나물을 만드는 중간중간 불린 찹쌀에 잡곡(수수, 조, 콩, 팥, 현미, 보리 등)을 넣어 전기밥솥에 세 번 밥을 했다. 음식은 만드는 대로 준비해 둔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 뚜껑을 닫아 두었고, 그렇게 아침부터 시작한 일이 오후 3시쯤 끝이 났다. 뒷정리를 하고 배달을 하고 나니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개운하다. 어머님께서 '고생했다, 고맙다'라고 칭찬해 주실 것만 같다.
남편은 왜 하느냐고 묻는다. 그럼 그냥 하고 싶어서 한다고 말하곤 웃고 만다. 남편에게 일일이 설명하자니 낯 뜨거워서 말하지 못한 점도 있기는 하다. 어머님은 거의 30년 동안 일찍 출근하는 며느리의 새벽밥을 꼭 챙겨주시고, 우리 아이들 둘과 동서네 아이들 둘을 힘들다 내색하지 않으시고 키워주셨다. 때가 되면 만두나 빈대떡, 팥죽, 오곡밥 등을 넉넉히 준비해서 나눠주셨다. 무엇보다 어머님께 고마운 것은 혼자 사시는 우리 친정엄마를 꼭 챙겨주셨다는 점이다. 거의 매일 혼자서 식사하실 사돈을 생각하셔서 음식도 싸서 보내시고, 오시라고 청해서 함께 식사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셨다는 점에서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형님이나 도련님네보다 같이 사는 우리가 더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이제는 내가 보답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을 준비했지만 지금 먹어보니 어느 것은 싱겁게 되고 어느 나물은 짜게 되었다. 내가 먹어도 썩... 그래도... 정성으로 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