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평화기행
- 1박 2일 다크투어(2023. 06. 15 - 06. 16)
글 서서희
제주 4.3 평화기행을 다녀왔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들은 시간이었다.
공항에서 만나 처음 간 곳은 주정공장옛터였다. 주정공장은 4.3 당시 수용소로 활용되던 곳으로 <청년층은 대부분 재판에 회부되어 육지부 형무소로 이송됐고 이들 중 대다수는 한국전쟁 직후 집단희생 당한다. 수감됐던 사람들이 주정공장 바로 앞 제주항 앞바다에 수장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제주 다크투어 자료)고 한다.
그다음 간 곳은 제주 4.3 평화공원이다. 4.3 당시 돌아가신 분들의 위패봉안소와 행불자 각명석 등과 비설 등을 보았는데, 비설은 <1949년 1월 6일 봉개동 지역에 2 연대의 토벌작전이 펼쳐지면서 군인들에게 쫓겨 두 살 난 젖먹이 딸을 등에 업은 채 피신 도중 총에 맞아 희생된 당시 봉개동 주민 변병생 모녀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기념조각이다. 등신대의 청동조각상인 이 작품은 4·3 당시 하얀 눈밭을 표현한 백대리석의 원형판 위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죽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공원의 지면보다 낮게 조성된 조각상까지 달팽이형의 제주석으로 조성된 진입로 벽에는 제주 전래의 자장가인 ‘웡이자랑’이 오석 위에 음각되어 있다.>(제주 4.3 평화재단 자료)
오후에 간 곳은 너븐숭이 기념관으로 북촌마을에서 있었던 북촌주민학살사건에 관한 영상자료를 보고 위령비에 묵념을 한 후 이곳 이름이 왜 너븐숭이가 됐는지, 그리고 옴팡밭에 만들어 놓은 순이삼촌을 형상화한 조각품 등을 보았다.
<북촌리는 조천읍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이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운동을 한 선각자들이 많았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7년 8월 경찰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마을 포구에서 발생한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부터 늘 군경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고, 4․3의 와중에는 많은 청년들이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피신하면서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한편 1948년 11월 17일에 선포된 대통령령 31호의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은 해제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1월 17일,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학살 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들과 밭에서 자행됐다. 이 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주민 500여 명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된 것이다. 동시에 마을의 집들도 다섯 채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 북촌 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팡이 있어서 '너븐숭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애기무덤 20 여기가 군락을 형성해 있어 당시 참혹했던 북촌대학살을 증언하고 있다.>(제주 다크투어 자료)
다음날은 대정 쪽으로 이동해 셋알오름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일제 동굴진지를 보았고, 섯알오름에서는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묻힌 곳과 그들의 시신이 뒤엉켜 분간할 수 없어 <백조일손지묘>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백조일손지묘는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 중 일부가 묻힌 무덤.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할 양곡 창고에는 예비 검속으로 7월 초부터 붙잡혀온 347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1950년 8월 20일 (음 7월 7일) 밤중에 이들 중 250명가량을 창고에서 끌어내어 해병대와 경찰들이 합동으로 섯알오름(송악산의 한 봉우리) 기슭에서 새벽 2시와 5시경에 61명, 149명으로 나누어 총살을 하였다. 백조일손 희생자란 이때 희생된 210명~250명 중 1957년에 발굴되어 현 묘역에 안장된 132명을 말한다. 2시경에 희생된 61구의 시신은 3년(혹자는 6년) 후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파내어 한림읍 갯거리오름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지만 약 40명의 명단과 시신은 아직도 그 행방을 알지 못한다. 총살당한 시신을 수습할 자유마저 빼앗긴 채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6년 8개월 만에 거의 형체도 알 수 없는 시신 149구의 유골을 수습하고 그중 132구를 현재의 공동 묘역에 안장하였다. (시신 중 옷가지 등으로 구별할 수 있었던 경우는 가족들이 독자적으로 수습)
1960년에는 유족들이 묘비를 세워 '백조일손지묘'라 칭하고 뒷면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시신을 구별할 수 없었기에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세력의 횡포로 비가 박살 나는 수난을 겪었다. 오늘날의 위령비는 1993년에 다시 제작한 것이며 부서진 비 조각은 땅에 묻혀 있다가 1999년에 발굴하여 현 위령비 옆에 전시해 놓고 있다.>(VISIT JEJU 자료)
그리고는 진아영할머니 삶터로 이동하며 그분의 비참한 삶에 대해 들었다. 진아영 할머니는 35살 나이에 무장대로 오인해 경찰이 발포한 총탄에 의해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평생을 무명천으로 입을 가린 채 비참한 생을 살아야 했던 분이었다. 그분의 이야기를 그린 <무명천 할머니(정란희 저)>가 있다. 그분의 삶터에서 생전의 다큐 영상물과 사진자료를 보고는 다들 눈가가 붉어진 채...
공항으로 오면서 "이제까지 제주를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알고 다녔는데, 제주에 이런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어 너무 가슴 아팠다. 이제라도 이런 사실을 많은 분들에게 알리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제주 4.3 평화기행을 마쳤다.
이번 여행을 마치면서 이 평화기행의 해설을 해주신 이상언 님(제주 4.3 희생자 유족회 상임부회장)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문학을 하는 분들이 모인 단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 위주로,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는 이번 평화기행에서도 가슴 아픈 일을 겪은 제주의 역사를 알기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주 신화를 공부하고 제주 4.3을 공부하고 제주 제2공항 문제를 공부하면서 아름다운 제주가 왜 이렇게 많은 아픔을 겪어야만 했는지,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이 왜 자꾸만 훼손되어야만 하는지 너무나 안타까웠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강정 지역에 해군 시설이 들어와 아름다운 강정의 자연환경이 훼손되었는데, 이제 제2공항 문제로 제주가 또 한 번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제주는 관광객이 이미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관광객을 줄여야 하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제2공항은 필요치 않다는 점, 제2공항은 미군 군용기(?) 착륙장소라는 필요에 의해 억지로 강행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막으려는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힘을 보내주십사고 간절히 부탁드린다.
주정공장 역사기념관 내부 벽화 옛 주정공장 역사기념터(묶여가는 사람들과 눈물을 형상화한 조각품) 위패봉안실에서 위패봉안실 비석 행방불명 희생자 위령비 비설(희생자 변병생 모녀의 기념조각) 제주 4.3 희생자 각명비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형상화한 조각(이승과 저승의 경계) 제주 4.3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 모습 용암이 흘러간 자국이 그대로 굳어진 곳을 '숭이'라고 한다(북촌 너븐숭이 기념관 이름이 여기서 생겼다고...) 백조일손지묘 위령비 셋알오름 일제고사포진지에서 진아영 할머니 삶터를...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 비치된 사진과 자료(VISIT JEJU 자료) 진아영 할머니를 그린 <무명천 할머니> 새 책으로 다시 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