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 막기
살다 보니
어쩌다 보니
무력감이 찾아온다.
슬럼프가 찾아온다.
흠뻑 젖은 이불 마냥 나를 차갑게 짓누른다.
이런 위기는 최근 겪은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 아니다. 그 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부터 왔다. 나를 나답게 만든 그 무언가,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그 무언가, 나 자신으로부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상황이나 환경을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힘이 없다는 뜻이다
이 놈은 뚜렷한 형체도 없으면서 힘은 아주 강력하다. 아주 교묘하기까지 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와서는 어느새 턱밑까지 차오른다.
이 놈에게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힘을 다시 비축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도가 있는가?
잠을 많이 자보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 힘껏 떠들기도 해 본다. 만족감을 주는 일을 하면 상태가 나아지기도 하는데 일단 무력감이 썰물처럼 들이닥치기 시작하면 이미 너무 늦은 거다.
무언가를 시작할 힘이 없다.
희망이 부질없어 보이고 회의감이 들며 한걸음 한걸음 때기가 쉬워지지 않는다.
의지라는 톱니바퀴 하나가 망가져 전체가 쉽사리 돌아가지 않는다.
이런 부분이 놈의 공포스러운 능력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나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교묘하게 혈을 콕 찍어 숨통을 죄여온다. 체력을 회복하는 방법도 차단해 버린다. 내부의 변화도 외부의 변화도 모두 막아 버린다.
나를 가라앉혀버린다.
그 누구의 따듯한 위로도 차가운 벽을 넘어 나를 데워주지 못한다.
고통과 불안의 감정을 주위로부터 공감받지 못하고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버린다.
HP는 체력이면서 물리적 능력이다. 잘 먹고 잘자면 높은 수준으로 유지가 되고 HP가 0이 되면 죽음이다. 이 무력감이란 놈은 HP가 아니라 MP에 타격을 준다. MP가 0에 도달하더라도 당장은 죽지는 않는다. 다만 많은 부분에서 능력을 제한시키고 서서히 말려 죽인다.
MP는 정신력이다. 실존하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 게임이나 만화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정신력이 높은 사람은 보유한 지식이나 정보 등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MP는 현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능력이다. 레벨업을 해서 MP용량을 크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매 순간 바닥나지 않게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
상사의 잔소리
주식투자의 실패
인간관계 악화
이 모든 상황에서도 MP를 지켜내야 한다
비장의 한 수가 필요하다. 나의 MP를 채워줄 묘약이 필요하다.
나의 묘약은 기록이다. 과거 힘든 시기를 기록한 나의 역사책이며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제안한 공략집이다
게임마다 다른 공략책이 필요하며 그 누구도 나를 위한 공략집을 대신 써줄 수 없다.
매일매일 가라앉아 수면 위로 올라가지 못할 때
바닥 아래로, 지하층을 뚫고 내려갈 때
나는 내 지난 기록을 본다.
아무리 힘든 지금의 상황이라도 한번 겪었던 상황과 비슷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과거 내가 고심하고 노력하여 얻은 공략은 그대로 다시 적용될 수 있다.
그 어떤 비법서보다도 값지다.
당신의 비법서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