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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과 그녀

산과 그녀

(5)

by 쏴재

설산이 황혼을 삼키던 무렵에야 샤브루베시에 도착했다. 마을이라고 부르기엔 쓸쓸했다. 강을 따라 띄엄띄엄 자리 잡은 목조 숙소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서양인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고, 타멜에서 마주치던 한국 사람들도 포카라로 떠났는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유리문도 없는 작은 가게에 들어섰다. 선반 위에 놓인 짤막한 바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나나가 자랄 만큼 따뜻한 기후구나.' 그녀는 바나나 몇 개와 과자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기다렸다. 간장 맛도 나지 않는 짠맛의 야채 카레가 전부였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산넘어 저 멀리 바다에도 해가 올라오기 전에 잠이 깼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까만 벨벳 천을 펼쳐놓은 듯한 하늘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가이드가 나눠준 해드랜턴을 이마에 걸치고 다음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짙은 남색 하늘이 조금씩 희미해지더니 설산의 흰 봉우리가 해를 반사시켜 황금빛으로 보였다. 옥빛 강물이 그 옆으로 흘렀는데, 차가운 물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노래처럼.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이름 모를 온기가 숨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이 길을 걸어간 이들의 숨결 같기도 했고, 아침이 오기 전 마지막 별들이 남긴 체온 같기도 했다. 그제서야 짙은 녹음과 갈빛 흙이 서로를 감싸는 산길이 드러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와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할머니가 계셨다면 달랐을까? 그녀는 아쉽지 않았다. 할머니가 산으로 돌아간 것도 자신 아버지와 멀어진 것도.


"서울로 가겠다고?" 집에 돌아와서야 아버지가 물으셨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깊은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름진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고는 말을 더 하지 않았다. 그저 딸이 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녀는 해양생물학과가 있는 대학들 중에서 가장 멀리 있는 곳을 골랐다. 할머니가 사라진 산도, 아버지의 한숨도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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