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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과 그녀

산과 그녀

(7)

by 쏴재

새벽이 걷히면서 나무들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잎사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 부드러웠다. 발걸음이 조금 무거워질 때쯤 들른 롯지에서는 따뜻한 차를 마셨다. 창가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동안, 산은 조금씩 더 깊어져 갔다.


하루에 한두 번 마주치는 등산객들 대부분은 포터와 함께였다. 무거운 짐을 맡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르는 이들 사이에서, 그녀는 가이드 한 명만을 동행했다. 10킬로가 넘는 배낭을 메고 걸었지만 아직은 고도가 높지 않아 큰 불편함은 없었다. 가끔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 그것은 마치 새벽공기처럼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따뜻했다.


그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웅장한 자연 앞에서 그들은 그저 작은 걸음을 옮기는 존재일 뿐이었다. 말없이 걷다가도 문득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면, 그곳에는 이미 산이 있었다. 어색함을 감싸 안은 채, 수백 년을 그래왔듯 묵묵히 서 있는 산이. 가이드는 종종걸음을 멈추고 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 어떤 새들이 날아드는지, 비가 오면 어떤 바위가 미끄러운지.


아버지에 이어 남자와의 사랑에 실패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넓고 높고 단단해 보였다. 허상이었다. 그가 거짓된 게 아니라 그녀가 믿었던 것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이었을 뿐 그런 그가 실제한건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산을 버렸듯, 남편은 그녀를 버렸다. 다만 아버지는 조용히 산을 떠났지만, 남편의 배신은 사무실 복도를 타고 흘러 다녔다.


같은 회사 여자였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시선이 더 무거웠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눈빛들, 회의실에서 들리는 속삭임, 점심시간에 비어 가는 옆자리. 동료들은 말했다. 네가 불편한 게 아니라 상황이 불편한 거라고. 하지만 그들의 위로는 넓은 강물에 떨어지는 눈처럼 사라졌다.


아침이면 책상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예전에는 따스하게 느껴지던 그 빛이 마치 형광등 불빛처럼 사무적이고 건조하게 느껴졌다. 그 빛 아래서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통화를 했다. 그리고 습관처럼 그가 일하는 건너편 사무실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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