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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진다. 하얗게 쌓이는 눈을 보고 있으면 서울이 아니라 문득 깊은 산속에 있는 것만 같다. 아무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던 새하얀 눈밭. 그곳에 자신의 일부를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산을 떠나왔고, 남편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 묵묵히 일했다. 하지만 결국 남은 것 보다는 잃은것이 느껴졌다. 아니 뭔지 모르게 잃었다는 느낌만 들었다
성인된 후 오랜시간을 보낸곳이 있더라도 어릴적 각인된 시간과 공간의 흔적은 지우지 못한다. 노트북을 켜고 항공권을 예매했다. 제주행. 그녀는 검은 화면 속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낯설다. 고루하게 벼텨왔던 서울의 집과 회사가 외국 저 어딘가처럼 느껴졌다.
'저 멀리 한라산에는 지금쯤 눈이 쌓여있겠지. 그 눈은 서울의 눈과 다를까. 아니면 모든 눈은 결국 같은 무게로 내 어깨를 누르는 걸까.
예매 완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창밖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결혼식 때도 제주에 가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그녀의 선택을 지켜보듯 조용히 있었다. 그녀는 집과 아버지를 따로 띄어내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본 아버지는 항상 산이나 집에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집은 변함없었다. 담쟁이덩굴이 감아 올라간 커다란 느티나무는 여전히 묵직하게 서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도 그대로였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 장독대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의 얼굴이었다. 엄마보다도 더 깊게 패인 주름, 더 희어진 머리카락. 그런데도 웃음만큼은 이상하리만치 해맑았다. 맑은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그녀를 더 아프게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가 물으셨다.
"산엔 종종 다니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아버진 요즘 다시 다니기 시작했어. 할머니 가시고 한동안은 못 갔는데..."
뜨거운 것이 눈가에 차올랐다. 손끝에서 귀까지 크게 들리는 맥동에 따라 숨이 짧아졌다. 그녀는 산을 버렸다. 아버지가 버렸던 것처럼. 아니, 아버지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래서 서울로 갔고, 회사에 다녔고, 결혼도 했다. 모든 선택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산을 떠나기 위해, 아버지의 길과 다른 길을 걷기 위해. 그런데 아버지는 다시 산으로 돌아가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치 그 시간이 잠시 멈춰있었다는 듯이. 억울했다. 그녀가 버린 것들, 잃어버린 것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시간들은 누가 책임져 주는 걸까.
장독대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마치 시계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아버지와 그녀는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걸어왔다. 아버지는 산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고, 그녀는 아직도 떠나는 중이었다.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다른 걸음을 걸었다. 창밖의 느티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