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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버렸다거나,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희미해질 무렵, 그녀 안의 뜨거운 것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것이 분출된 후 서서히 식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굳어갔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도 새로운 자신이었을까. 그때 해외 대학에서 포스트닥터 프로그램 합격 메일이 도착했다.
바다를 사랑한다고 말해왔지만, 사실 그동안은 사랑하려 애쓰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의무처럼, 혹은 도망치듯 바다를 찾아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정말로 자유롭게 바다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누군가를 대신해서가 아닌,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현미경 렌즈 너머로 플랑크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들의 춤추는 듯한 움직임은 때로는 별들의 흐름 같기도 했다. 수면 위 수평선이 아닌, 현미경 속 작은 우주에서 바다의 또 다른 깊이를 발견했다.
젖은 해초를 분류하는 일은 고요했다. 소금기 묻은 손끝으로 해초를 만지며, 그것이 자라난 깊이와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각기 다른 모양과 질감을 지닌 해초들은 마치 바다가 쓴 일기장 같았다. 그녀는 그 일기를 읽어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개껍데기의 섬세한 무늬를 종이에 옮기는 동안, 그녀 자신도 모르게 바다에 젖어들고 있었다. 무늬 하나하나가 품은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문득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바다와 나누는 은밀한 대화였다는 것을.
바닷속 생물들을 연구하면서 그녀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수심 삼십 미터에서 빛이 달라졌다. 햇빛은 물속을 통과하며 부서지고 흩어져 달빛처럼 은은해졌고, 그 빛 속에서 물고기들의 비늘이 별처럼 반짝였다.
혼자 잠수할 때면 깊은 고요 속으로 잠겼다. 공기방울이 올라가는 소리만이 그녀의 귓가를 채웠다. 그 순간만큼은 지상의 모든 소음과 걱정이 사라졌다. 수면 위의 세상은 멀어졌고, 이곳에는 오직 현재만이 존재했다. 육지에서는 늘 불안하게 떨리던 마음이 이곳에서는 잔잔한 물결이 되었다. 패럿피시들이 산호를 쪼아 먹을 때마다 들리는 '딱딱' 소리는 시계 초침처럼 규칙적으로 울렸다. 산호초 틈에서 올려다본 수면은 하늘 같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수중을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실험실에서 염도를 측정하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바다는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산의 눈물일지도 모른다고. 깊고 검은 협곡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들이 모여 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의 눈물도, 아버지의 한숨도, 그리고 그녀가 참아온 그리움도 모두 이 바닷속 어딘가에 녹아있을 터였다.
겨울이면 창밖으로 날리는 눈을 보며 생각했다. 이 눈이 녹아 산과 들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겠지. 마치 할머니와 함께 산을 오르던 날, 그들을 감싸안던 그 눈처럼. 할머니를 숨겨주던 그 산처럼 결국 모든 것은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그것은 사랑보다 더 깊은 무언가였다. 산을 향한 그리움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남편의 배신도 모두 이 깊이 앞에서는 작아져 보였다. 바다는 끝없이 넓어서 모든 것을 품었고, 깊어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었다. 실험실에서 플랑크톤을 관찰하며 그녀는 종종 생각했다. 이 작은 생명체들도 어쩌면 누군가의 눈물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이제 그 깊이에 그녀 스스로를 맡기기로 했다. 더 이상 사랑하려 애쓰지 않아도, 바다는 그곳에 있었다. 변함없이, 끝없이. 그리고 마침내 에베레스트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조개 화석이 발견되는 그곳에서 어쩌면 바다와 산이 나누었을 오래된 대화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다도 한때는 산이었고, 산도 언젠가는 바다였다.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마치 그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녀의 모든 상처와 그리움을 품고 있는 것처럼. 에베레스트의 조개 화석은 어쩌면 바다가 산에 남긴 마지막 편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그 편지를 읽으러 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