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겉보기에는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 같았다. 아침이면 일어나 출근을 했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때로는 친구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표면적인 것이었다. 수면 아래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그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는 몰랐다. 왜 인지 이유를 몰랐고 언제 올지도 몰랐다. 진짜 이름은 모르지만 무력감, 우울감, 슬럼프라고 불리는 그놈은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달려와서는 쿵하고 처박은 것 같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벽에 부딪힌 것처럼. 창백한 형광등 아래 앉아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언제나 회색빛이었다. 헤쳐나갈 뚜렷한 방도는 없었다. 그저 무작정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라는 약을 처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달력의 숫자들이 바뀌어갔고, 계절이 변했다..
서울에서의 삶은 늘 바빴다. 발걸음은 빠르고, 하루는 긴박하게 흘러갔다. 지하철역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어깨가 부딪히고, 횡단보도 앞에서는 누군가 초록불이 켜지기도 전에 한 발을 내디뎠다. 성공이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이루는 것에 달려 있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쉼 없이 움직였다. 커피를 마시며 걷는 사람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모두가 시간을 아끼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는 10여 년 전 뉴욕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그곳 사람들도 무척 차가웠고,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맨해튼의 높은 빌딩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늘 매서웠고,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시선들은 무심했다. 출근 첫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동료들의 표정은 마치 투명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감추고 억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인사했다. "안녕, 내가 새로 온 그 직원이야. Hi, I'm the new guy. 반가워. It's good to meet you."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동료는 없었다. 점심시간이면 혼자 샌드위치를 들고 브라이언트 파크의 벤치에 앉아 있곤 했다. 몇 안 되는 한국인 동료들 사이에서도 어색함이 가득했다. 여기 서울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회사에 있는 사람들은 화가 많았다. 조금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목소리가 높아졌고, 작은 실수에도 얼굴이 붉어졌다. 마치 모두가 터질 것 같은 풍선을 가슴에 안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조차 견디기 힘들어했고, 회의실에서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숨죽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들은 그 자신에게 이유를 찾아보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이유를 찾아보기도 했다. 어떤 이는 거울 앞에서 오래도록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고, 또 어떤 이는 동료의 뒷담화로 시간을 보냈다. 커피머신 앞에서, 흡연실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끊임없이 되짚어보았다. 하지만 그 자신의 심리나 감정이기 때문에 자신의 원인을 파악하는 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치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자신의 내면은 어둡고 깊어서 바닥을 알 수 없었다.
외부원인을 찾아 해결한다는 것은 타인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어려웠다. 타인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단단한 돌을 맨손으로 깎아내는 것과 같았다. 상대방의 마음속에는 이미 굳어진 생각들이 있었고, 그것을 허물어뜨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처럼 서로의 마음은 투명하게 보이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