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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직한 이유_12

2022

by 쏴재

그는 도움을 찾으려 했다. 정신과 상담실에서 의사와 마주 앉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다른 방법이 있었거나 그만큼 절실하지 않았더라면 자신 스스로를 해부하는 일,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 따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방해 주는 약도 수개월간 먹었다. 감추고 싶은 물건처럼 새끼손톱보다 작은 알약들이 그의 서랍 맨 아래 구석을 차지했다.


그놈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때로는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강렬한 고통을 주고, 가끔은 '정말 죽이려는 생각이 아니야'라는 착각이 들게끔 숨통을 살짝 풀어주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그를 완전히 놓아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한 번에 끝내주지도 않았다.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놈에게 지지 않으려고 싸웠다. 새벽 5시,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었다. 갈리고 부서지는 소리가 고요한 새벽을 깨웠다. 드리퍼에 뜨거운 물을 붓고 책을 읽었다. 쉬운 문장이지만 읽히지 않은 문자들은 그는 눈을 부릅뜨고 채워 넣었다. 그리고 삼켜냈다.


운동복을 입고, 갈아입을 옷을 배낭에 넣고 집을 나선 뒤 그는 걷기 시작했다. 아직 어둑한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만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줄였다 했다. 강변에 도착해서 아주 느리게 달리다가 속도를 올렸다. 차가운 새벽 공기는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가 뜨겁게 데펴저 나갔다. 한참을 뛰고 회사 근처 헬스장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그놈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틈을 보이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어도,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그의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벌레보다 지독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작은 균열이 생겼고, 그 작은 균열은 그를 또 무너뜨리고 말았다. 마치 오래된 댐에 금이 가듯, 발목의 통증으로 시작된 부상은 그의 일상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동안 쌓아온 일상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갔다.


그는 패배했고 더 깊은 곳으로 빠져버렸다. 잠시 희망을 엿볼 수 있었지만 지속된 통증은 그를 여러 번 무너뜨렸다. 아침이면 여전히 알람이 울렸지만, 더 이상 새벽 달리기는 없었다. 그라인더에서 원두가 갈리던 소리도 멈추었다. 강변의 산책로는 이제 남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산책도 하기 싫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만나는 일도 귀찮았다. 전화가 울리면 두려웠다, 메시지는 읽지 않은 채로 쌓여갔다. 집 안에 빨래는 쌓여갔다. 세탁기 안의 젖은 옷가지들이 하루, 이틀 지나도록 그대로였다. 출근을 위해 입을 옷들만 골라내서 입곤 했다. 잠을 잘 자기도 어려웠다. 밤이면 천장을 바라보며 끝없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저녁이 되면 무거운 시간이 찾아온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새벽빛이 점점 짙어질 때까지, 그는 이불속에서 뒤척였다. 내일이 오는 것,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싫었다. 먹고살기 위해 회사를 다녔다. 아니 그는 살고 싶어서 움직였다. 아무리 피가 나도 이대로 포기한다면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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