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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쏴재 Jun 24. 2022

자유사랑 시장 논리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찾을 것이다 사랑을

우리는 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는가? 애인을 바꾸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인가?

더 나은 선택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이미 애인이 있는데 새로운 가능성에 흔들리려 아쉬운 마음이 들거나 해어 진적이 있는가?

헤어지는 선택을 한 것이 합리적인 이성이며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자유사랑 시장논리에 따라 누구든 사랑할 수 있고 누구나 나를 사랑할 수도 있다. 최소 투자 최대 이익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투자하고 어떤 사랑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투자를 하기 위해선 시간, 관심, 돈 이런 자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랑 이외의 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는 자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사랑이란 것 매우 복잡해 보인다. 우리가 획득하려고 하는 '사랑'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랑’이라는 게 이상적인 형태를 가진 하나의 무언가가 있어서 그것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우리가 사랑스러운 행동을 할 때나, 연인이 사랑스러운 행동을 하거나,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낄 때 사랑이 존재한다. 사랑은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감정이 사랑이다.'라는 생각은 개인차가 많이 난다. 사랑이란 감정의 특성은 매우 다양하지만 단순하게 후려쳐서 3가지 속성이 주된 것이라 생각한다.


종교적 사랑, 신을 향한 사랑은 완벽하다. 한계가 많고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17세기 이전에는 현대에서 생각하는 낭만적인 사랑의 개념이 없었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로맨스, 낭만적 사랑은 이후에 만들어진 사랑의 개념이다. 17세기 이전에 인간의 향한 사랑은 매우 본능적이고 생물적이었다. 이 개념들의 속성을 들여다보자


1번 속성, ‘절대 사랑 속성’으로 빛과 비슷하다. 빛의 부재가 어둠인 것처럼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그 무엇의 부재가 있을 때 이 속성이 나타난다. 그 무엇이 '부도덕이고 생물적인 것'이고 어둠이다. 이 속성은 친절함, 따듯함, 존경, 무조건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신을 사랑하듯 궁극의 목표가 있다. 예를 들어 부모님도 사랑하고 친구도 사랑하고 여러 사람들을 사랑하곤 한다. 1번 속성을 이용하여 사랑을 한다. 그런 이런 빛의 속성이 강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섹스는 할 수 없다. 할 필요를 못 느낀다. 섹스는 빛의 반대인 어둠 '생물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에서 성 선택이 중요하다. 동물은 번식의 도구인 성기에 집착한다.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아들은 엄마의 가슴에 집착을 보인다. 어린 딸 또한 아빠의 생식기에 집착을 보이는 시기가 있다. 동물에게는 근친상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유전병의 이슈가 있지만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인류는 도덕과 문화를 이용하여 성을 제한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본능적이다.  

1번 속성의 사랑을 하는 사람도 섹스가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섹스를 통한 느끼는 것이 본능적인 쾌락만 있는 게 아니라 따듯함과 친절함도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타협이 가능하다. 사회문화적인 발전으로 도덕이 탄생했지만 내가 타인을 헤치지 않는 이유는 오직 법과 도덕 때문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살인을 거부한다. 본능적인 것이 부도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번 ‘철학자적 사랑 속성’으로 자아실현을 하려는 사랑이다. 타인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내가 타인을 사랑할 때 나의 본질을 찾을 수가 있다. 이런 속성은 호기심, 깨달음, 새로운, 변화, 입체적인 특징을 가졌다. 애인의 다양한 면을 입체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1년을 보고 10년을 보더라도 새로운 면을 찾게 된다. 그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으며 그 행동의 감정적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한다. 섹스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감정이 행동으로 표현되고 타인을 사랑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섹스라는 놀이를 개발하고 발전시킨다.

 

3번 애정결핍 아이 속성. 사랑의 속성 중 하나긴 하지만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1번 2번 속성의 사랑은 무엇을 추구하고 원하는 사랑인데. 3번은 결핍이다. 지양되어야 할 타입으로 보인다. 그래도 애정관 관심을 갈망하는 건 우리 본능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결핍을 가지고 있다. 애인이 나에게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주기를 원한다.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게 된다. 이런 집착이 강한 사람은 집착이 사랑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착각이다. 서로를 힘들게 한다면 부정적인 면을 줄이는 게 해결의 방향인데 집착을 내가 추구해야 할 사랑이라고 착각하면 답이 없다


위의 속성을 적절히 버무린 것이 내가 하는 ‘사랑’이다. 다시 위에 질문으로 돌아가 '나는 이미 애인이 있는데 새로운 가능성에 흔들리려 아쉬운 마음이 들거나 해어 진적이 있는가?'를 고려해보자

내가 버무린 사랑에 1번 ‘절대 사랑’을 많이 넣었으면 자신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덜하다. 아니 나와 연인 모두에 대한 의심을 의심한다. 의심은 죄악이다. 절대 사랑으로 극복해야 한다. 헤어지게 되어도 다시 열심히 투자하여 추구하는 사랑에는 ‘절대 사랑’을 많이 넣을 수밖에 없다. 이 사랑은 절대 실패할 수 없다. 

2번 ‘자아실현 사랑’ 많이 넣었다면 매번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고 의심한다. 나를 의심하고 내 애인을 의심한다. 지금의 애인과 사랑에 빠지고 깨닫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외부의 환경에 취약하다. 헤어지고 또 다른 애인을 만나 사랑을 찾아도 내가 무언가를 찾기 전까진 만족하지 못한다. 자기 검열의 기준이 높다. 새로운 애인과도 또 헤어질 수도 있다. 지금까지 만났던 연인들은 모두 다 별로였어라고 비난할 수도 있고 자신을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람을 많이 맞은 나무의 뿌리는 튼튼하다. 진정한 나를 찾는 사랑을 하기에 인생의 위기에서도 잘 대처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데서도 그렇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찾을 것이다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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