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지금 그게 중요해?"

연말 계획 엎어진 기획자들에게 바치는 글

by Cyrano

2016년의 탄핵정국과 2020년의 팬데믹, 그리고 2024년 지금. 다시 비상시국이다. 이렇게 금방 또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만 요즘이야말로 “이 시국에~”라는 말에 진정 걸맞는 난세가 아닐까 싶다.


모두 겪어서 알다시피 ‘이 시국’에는 심리적으로 많은 제약이 생긴다. 우리는 집합금지가 풀린 동안에도 눈치껏 외부 활동을 자제해야 했고, 놀 때 재밌게 놀더라도 그런 일상을 SNS에 올릴 때는 평소보다 더 유의해야 했다. 요즘은 여의도 시위나 학생총회 대신 다른 곳에 참석한 날에는 인스타 업로드를 삼가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물론 이 제약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행동을 적극적으로 같이 하진 않았지만 시국의 엄중함에 공감하고 있다는 티를 내고, 파국과 분열을 상상하는 사회적 불안을 덜고, 연대를 확인하려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여러 브랜드가 요즘 같은 비상시국에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을 자제하거나 그 내용을 수정하는 것도 크게 보면 같은 맥락이다. 나는 지난 열흘 동안, 연말을 맞아 대규모 캠페인을 준비하던 기업들의 대처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기획자로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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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나는... 믿거나 말거나 감이 아주 좋다. 계엄 다음 날 문득 ‘뭔가 할 것 같은데’ 감이 왔던 곳은 신세계백화점과 돌고래유괴단의 “HELLO, NEW SANTA”였다. 나름 근거 있는 감이었는데, 그 프로젝트의 화제성과 마일스톤 때문이었다. 화제성 면에서는 2024년 가장 상징적인 연말 캠페인으로 남게 될 것이 분명했고, 시기상으로는 지난 주까지 아직 본 게임을 시작하지도 못한 단계였다. 그런 캠페인을 기존 계획대로 밀고 갈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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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1일 수요일, 기다리던(?) 스케줄 변경 공지가 신우석 감독 스토리에 떴다. 영상 공개를 미룬다는 소식이었다. 감사하게도 “혼란스러운 시국”이라며 연기 이유를 명시해주신 덕분에 내 가설을 검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속상해졌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들은 세상에 별일이 있을 때면 가장 먼저 별거 아니게 되는 것들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광고가 미뤄진 데에는 ‘이 시국’ 분위기보다 더 중한 이유들도 있을 거다. 광고, PR을 비롯한 커뮤니케이션 기획은 꼭 이런 시국이 아니어도 언제나 가장 먼저 예산이 깎이거나 계획이 엎어지는 일 아니던가. 단순히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의 소비심리가 위축되는 것을 고려해야 하고, 그러면 매체비를 또 생각해야 한다. ‘이 시국에 예산을 이렇게 쓰는 게 맞나?’


2024-12-13 17;07;13.PNG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 국회의장의 한 마디는 다름 아닌 "송년회를 재개하라"였다.


어쨌든 감독님 말마따나 시국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카리나와 산타가 작정하고 이목을 끄는 화려한 광고를 잠시 미뤄둬야 한다는 판단에 전제된 것은 이 모든 즐거움을 뒤로 하고서라도 급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큰일이 우리 앞에 엄연히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든다. 나는 왜 계속 이쪽 일을 하려고 하는 걸까. 어쩌다 이렇게 쉽게 흔들리고, 자칫하면 소음이 되고, 주책없는 것 취급을 받는, 매번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것들에 빠지게 되었을까.




새벽을 뜬눈으로 보내고서 맞이한 12월 4일. 누군가는 연말 프로모션을 하는 매장 앞에 늘어선 사람들의 줄을 보며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새삼스러운 것은 ‘일상이 소중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줄 선 사람들의 관심사가 이 시국에 ‘별거 아니게 된’ 것들을 여전히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생각할수록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광고든 뭐든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들은 지켜내야 하는 평범한 일상에 편입되어 있지만, 동시에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느냐 하는 질문 속에 가장 먼저 놓이게 된다. 지난 일주일 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쏟아지는 광고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참 작다고 생각했다. ‘내가 동경하는 크리에이티브가, 사실은 되게 작다.’ 이걸로 광고주의 고민을 멋지게 해소하거나 거리의 작은 불편을 해결할 순 있어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게 다 작은 고민들이구나.


한편으론 속보를 달고 나오는 별일들을 보면서 별거 아닌 것들에 몰두해도 되는 일상이 감사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작은 것들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꿀 거라는 스타트업을 보면 설레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교육자가 되려던 예전 꿈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역시 나는 큰일을 하는 것보다 세상의 큰일에 자리를 양보해줘야 하는 작은 이야기들을 만드는 편이 더 좋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이 세상만큼이나 '나'라는 작은 세계도 아주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스스로 만든 세계를 내보이는 게 당장은 더 중요해서 작은 것들을 기획하는 일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이런 마음으로, 취업도 안 한 주제에 기획자라는 정체성을 일찍이 선언했다.


그렇게 작은 기획자로 사는 동안 내가 만든 별거 아닌 것들이 나의 세계에 별일을 만들어주는 신기한 경험들을 했다. 가끔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해줬고, 때로는 냉소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줬다. 나는 요즘 같은 난세에서 낭만을 찾으려면 별것 아닌 것들을 만드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게 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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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덧붙여서, 이 시국에 자신이 만든 것들은 그저 아주 작은 것일 뿐이라는 여러 기획자들의 판단과 양보가 있기에 큰일이 큰일답게 다뤄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그 어느 때보다 고민하고 있을 기획자들 모두 힘내시길.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설득적이다.

대체 불가한 기획자로 성장하는 에세이 프로젝트, 오디세이

https://www.instagram.com/ody.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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