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혁 Jul 05. 2023

사라진 유서

초등학교 시절, 체육 시간이 되자 남자아이들은 축구화를 들고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움직이는 활동을 달갑지 않아 했던 나는 의자에서 뭉그적댔고, 친구는 나의 기분을 알아주기라도 했는지 먼저 같이 내려가자고 말했다.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했던 나인지라, 체육 시간만 되면 뭐가 그리도 좋은지 꽥꽥 소리를 질러대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싫었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나도 사람인지라 그날 그때의 순간만큼은 기분이 좋았나 보다. 1층으로 내려와 실내화를 벗고 친구보다 먼저 신발로 먼저 갈아 신고난 뒤, 아무 생각 없이 실내화 가방을 한 바퀴 돌렸다.


“악!”


친구가 비명을 질렀다. 실내화 가방은 그만 친구의 입 근처에 맞아버렸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너무너무 미안해서 죽고 싶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 그토록 혐오하던 내가, 그 당사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만. 아파하는 친구를 부축해 서둘러 보건실로 향했다. 보건 선생님은 친구의 상태를 살피는 데 시간이 좀 걸리니 먼저 나가보라고 말씀하셨다. 다리가 후들거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도중, 보건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친구의 치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쓰러질 것 같았다. 충치가 있던 친구였는데, 치아가 깨져서 더 아파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극한의 죄책감이 들었다. 운동장으로 나가자, 아이들은 축구를 하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고 그늘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체육 시간이 되면 저 틈 어딘가 억지로라도 끼어있었을 나인데, 이제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자멸감에 어쩔 줄 몰라 버티던 그 1시간도 채 안 되던 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마음이 지옥으로 향하는 것도 모자라, 마음이 상해버릴 대로 상한 친구에게 절교당할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저 막막했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왔다. 담임 선생님은 출장을 가 계셨고, 임시교사 선생님이 며칠간 우리 반을 맡아주시기로 했다. 임시 교사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리에 앉아보라 말씀하셨고, 운동하느라 땀에 젖은 아이들은 짜증 섞인 태도로 의자를 질질 끌었다.


“강신혁, 여기 있지? 나와봐.”

교실 분위기는 삼엄했고,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잘못한 거 있지 않아? 말해봐.”

“죄송합니다...”

“왜 그랬어? 미쳤어?”


임시 교사 선생님은 한 손가락으로 나의 어깨를 툭툭 밀쳐댔다. 또다시 죽고 싶었다. 그리고 임시 교사 선생님의 오른쪽 손은 내 오른쪽 뺨을 강타했다. 체구가 작았던 나는 죽은 나뭇가지마냥 픽- 쓰러졌고, 임시 교사 선생님은 좁은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나의 숨을 조였다. 뺨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으니까. 180cm가 넘는 성인 남성이 나를 때렸는데도, 그 친구에게 너무나 미안한 나머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차가운 교실 바닥에 꿇어앉아 엉엉 울고 있는 대역죄인이었다. 그 친구에게도, 교실 속 아이들에게도, 임시 교사 선생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나는 임시 교사 선생님에게 살면서 처음으로 뺨을 맞았다.


터덜대며 집으로 돌아갔다. 갈 힘이 없어 주변 무언가에 나의 40kg 채 되지 않는 몸무게를 간신히 지탱하면서. 현관 앞에 도착했지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기가 겁났다. 엄마에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해야. 떠오르질 않아서 무작정 집으로 들어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렇게 30분, 1시간이 지났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났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 나의 눈물은, 어린 여동생이 무슨 일 있나 하며 호기심을 갖고서 쳐다보기에 충분했다. 엄마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귀에 전혀 들어오질 않았다. 엄마는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았는지 더는 말을 걸지 않으셨다. 엄마는 옆에서 울어대는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주시느라, 분유를 챙기시느라 바쁘셨다. 그런 엄마를 두고 오늘 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꺼내봤자 뭐가 달라지겠냐고, 그렇게 마음먹었던 것 같다. 친구의 치아를 내가 아프게 했다고,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냐고 엄마한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정작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방음이 잘 안되었던 빌라에 거주했기에, 엄마가 아빠와 통화라도 하면 그 소리가 다 들렸다. 그날의 통화에서는 유독 금전적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 집이 그렇게 어려운 형편이었나, 할 정도로. 그렇게 삼시 세끼 중 한 끼 정도만 먹으러 거실로 겨우 나올 정도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말을 걸면,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큰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아빠는 그런 나의 모습에 화가 나셨는지 방문을 세게 두드리며 나오라고 소리쳤다. 원목이었던 방문은 아빠의 주먹에 부서져 작지 않은 구멍이 뚫렸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 다 엿볼 수 있을 정도였다. 천에 테이프를 붙여 구멍을 가려버렸다. 죄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생각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뒤로 다시 학교에 갔다. 아이들은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하고 있던 말들을 일제히 멈추고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시키기 바빴다. 그 친구가 교실에 들어오면 다친 곳은 괜찮냐고 말을 거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 또한 그 친구에게 안부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30명 좀 넘는 아이들의 반갑지 않은 눈빛들에 기가 죽어 아무 행동도, 말도 꺼내질 못한 채 죽은 듯이 엎드려 몇 달을 보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버텼는지는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 시도라도 했다면, 나는 현재 이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나의 방에는 연두색 공룡이 그려져 있는 벽지가 있었다.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다. 어릴 적, 뭐가 그리 힘들고 슬퍼서 긴 이야기를 벽지에 썼을까. 메모지 살 생각도 없었나 보다. 지저분하게 적혀있던 그 벽지는 우리 가족이 이사함으로써 다 뜯겨 찢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숨죽여 지낸 초등학교 시절, 별 건 없었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을 나 혼자 감당하고, 죽을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혼자서 많이 울어본 것 말고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기억을 빼면,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돌이켜보곤 한다. 짧다면 짧은 이 글을 기록하기 위해 며칠을 미뤘는지 모르겠다.


그 친구에게 미안한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몇 달 전, 그 친구에게 SNS 친구 요청이 왔어도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받지 못했었다. 언젠가 다시 그 친구와 마주치면, 그때 당시에는 다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미안한 감정을 다시금 꺼내 보려 한다. 성인이 되고 난 뒤 2살 더 지내보니까, 용기 낸다고 큰일은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더 부지런해지면서, 또 다른 이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소통하는 게 나의 평생 목표이다.


*2019년에 작성한 글로, 어쩌다가 이제야 올립니다.

작가의 이전글 숨죽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