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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장하트 Aug 22. 2023

안녕, 자아

일곱 살에 잃어버린 자아에게    

차라리 영영 찾지 말았어야 했을지 몰라.

그랬다면 하루하루를 편하게 지나쳤을지 모르지.

정확히 네가 언제 찾아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건 확실해.

네가 나를 찾아온 건지, 내가 너를 찾은 건진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동안 인사를 못했어.

너를 잃어버렸는지 조차 모르고 살았어. 

그래서 어디서부터 잃어버린 건지, 잊어버린 건지 찾아보려고 해. 


어쨌든 반갑다

각자의 선택으로 시작된 삶이 아니지만, 기왕 태어났으니 잘살아보자 하며 다들 살아가더라.

나도 눈떠보니, 아들을 간절하게 바라는 어느 평범한 가정의 3번째 딸로 순서가 매겨져 있었어.

그리고 나의 뒷번호가 태어났고 아들이었어. 그리고, 그 아이는 네 번째가 아닌 유일한 1순위가 되었지.

맞아. 존재감이 없는 3번째였어.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 그래서인지, 여전히 아직도 나는 내 이름이 어색해.

"누구의 동생", " 누구의 누나"


그래서 아마도 나는 4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너를 타인처럼 낯설게 여기지 않았을까 싶어.

다들 나를 보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했어. 그래도 너네 엄마가 아들을 낳았다고, 위로를 해주었어.

그래서, 나는 내가 딸로 태어난 게 나의 잘못인 줄 알았어. 


어릴 적, 우리 엄마는 자주 아팠어.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두운 안방에 늘 누워있던 엄마의 뒷모습이 나를 맞아주었어.

나 때문에 엄마가 아프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늘 미안했던 것 같아.

'내가 아들이었으면, 엄마가 덜 아프고 기뻤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집에서 태어났대. 일요일 아침에 갑작스러운 진통으로 병원에 가지 못하고 조산사를 불렀대.

위에 언니들과 다른 활발한 태동으로 임신 기간 내내 엄마는 아들이라고 장담하셨대.

병원에 가서 초음파로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만큼 확신하셨대.

모두들 나의 탄생의 순간에 긴장했었겠지.

그런데, 낳고 보니 딸이었던 거지.

너무 실망하셨고, 보기 싫어서 윗목으로 밀어냈다고 하셨어. 그 얘기를 살면서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아.


어릴 적엔 그런 말들이 기분이 오묘하게 나빴어. 

성인이 되면서 생각해 보니 나의 출생을 부정당하는 말이니까, 되새길수록 마음이 불편했을 거야.

당연히 나의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무의식 속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을 거야.

어린 시절의 나는 딸로 태어난 게 나의 잘못이니까,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유난히도 엄마의 심부름에 열심이었고, 시키지 않는 집안일도 했어. 

늘 엄마 주변에서 도울 일을 찾았고, 그걸 해내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


남동생이 태어나고 집에 왔던 어느 봄날을 또렷이 기억해.

일곱 살이었던 나는 유치원에서 하원을 했는데, 집안이 시끌 버쩍했어.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이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해주고 있었어. 

현관문밖에 서있던 나는 들어갈 수가 없었어.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리고, 이번생은 글렀다는 걸 알았던 것 같아.


그때 나를 놓았던 것 같아.

슬슬 찾아오던 자아를 놓쳤던 일곱 살 아니었을까? 



하루는 혼자서 유치원에 등원하다가 방향을 틀었어.

그때는 높은 다리였던 것 같은데, 아마도 하천길에 있는 작은 다리였을 거야.

다리에 걸터앉아서, 흐르는 물을 보면서 반나절을 앉아있었어. 그냥 그게 좋았나 봐.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지나고 집에 들어갔는데, 엄마는 내가 유치원에 안 갔는지도 모르더라.

'엄마는 내가 사라져도 모르겠네요'


그때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참으로 영특하기도 하지.

나의 존재를 알리고, 살아갈 방법을 나름 찾았는데 그게 심부름이나 집안일이었어.

그러면 적어도 엄마는 내가 필요할 때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찾으셨어.

엄마의 콩나물과 두부 심부름, 부엌에서 일할 때, 동생을 찾는 일, 옥상에서 빨래를 걷어오는 일 등...


여덟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나는 혼자서 입학식에 갔어.

움직이는 영상이 아니라 사진으로 기억되는 날인데, 그날의 온도나 냄새 이런 건 전혀 떠오르지 않아.

어른들의 허리만 보였고, 운동장의 흙먼지와 왕왕거리는 확성기였는지 마이크였는지 모르는 소음이 귀에 거슬렸던 기억만 남아있어. 어른들이 치고 지나갈 때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어. 울지는 않았지만, 울고 싶었을 것 같아.


너 이름이 뭐니?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은 할머니 선생님(노영숙 선생님)이 내 손을 잡았어.

그 손의 느낌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는데, 그건 고마움과 안도의 느낌이었을 거야. 

내 이름을 물어보시고, 나를 자기 옆에 붙여 두셨어. 그날 기억은 그게 다야.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키우면서, 나의 엄마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야.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이를 혼자 보냈던 것.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제일 설레고 함께 하고 싶은 날들 중에 하나인데 말이지.

우리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던 거였을까.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은 절대 아니야. 단지, 엄마의 어떤 마음이었는지가 궁금한 것뿐이야.

왜냐하면 내가 야무지거나, 똑똑했던 아이가 절대 아니었거든.

누가 말을 걸면 울음부터 나왔던, 겁 많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어.


그래서 나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을지 몰라.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건지 알아갈 겨를도 없이, 뭐든지 나 혼자서 해내야 하는 사람으로 말이야.

뭐든지 잘한다는 말은 아니고,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는 거에 전혀 두려움이 없다는 의미야.

아무튼 그렇게 어색한 내 이름을 왼쪽 가슴에 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의 유년시절은 대충 마무리가 되었어. 

낮은 채도의 흐린 흑백의 기억이야.

그때부터 자아 따위는 서랍 속에 넣어두고, 다시는 열어보지 않았나 봐.

살아남기에 바빴으니까.



너 생일이 중요한 게 아니야

자아, 너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살다가 다시 마주했던 건 8~9년 전쯤의 11월이었어.

늦가을 김장철이 되면, 내가 강원도에 가서 엄마를 도와드리고 서울에 사는 언니들에게 전달해주곤 했어.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였기 때문에, 시간이 있는 내가 도와드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일산 사는 나는 아침 일찍 내려가서, 두 언니네 들려 김장을 전달해 주고 오면 저녁이었어. 

힘들게 김장을 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당연히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런데, 그날은 내 생일이었어. 

11월 14일, 엄마는 아침 몇 시까지 내려오라고 전화를 하셨어.

"엄마, 내 생일인데 너무하지 않아."

엄마는 짜증이 섞여 대답을 했어.

"너 생일이 중요한 게 아니야"

.

.

엄마에게 일 년에 한 번 하는 김장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내 생일보다 중요하구나.

.

.

.

"엄마, 나 안 갈래" 

이후로 몇 년 동안, 김장철이면 수고한 나는 나쁜 딸이 되어 있었어. 

나는 그런 사람이었어. 있으면 편하지만, 딱히 없어도 크게 지장이 없는 사람인거지.


그때부터 휴화산이었던, 어쩌면 묻어두고 열어보고 싶지 않았던 나의 지난 시간들은 달궈지기 시작하면서 활화산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

화산이 터져서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원망 가득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마구 섞여서 쏟아져 나오는데 감당하기 어려웠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살아온, 이 고민을 이제야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어.

나는 엄마에게 거절과 무심함으로 대꾸했고, 엄마는 다른 가족들한테 나에 대하 서운함을 토로했어.

"애가 이상해졌어. 못돼졌어"

다른 가족들에게 더 이상 내가 싫은 건 안 하고 살겠다고 선언을 했어.

"하고 싶은 건 다 못하고 살아도, 하기 싫은 일은 이제 안 할 거야"

가족들이 모두 같은 대답들을 했어. 

"네가 못하고 산 게 뭐 있어?"



나는 누구였을까?

자아, 너는 혼자서 참으로 외로웠겠구나.

너를 잃어버려서, 잊고 살아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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