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깜장하트 Aug 22. 2023

엄마 이름으로 살아

아들이 열어준 서랍


엄마 이름으로 살아.



3년 전, 그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학원에서 나온 아이를 픽업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관적인' 엄마의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코로나와 함께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어 줌 수업이 많았던 아들과는 집에서 붙어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외고에 입학한 아들은 신경이 예민해있었고, 갱년기가 시작된 나는 여기저기 아픈 날이 많았다.

우리는 둘 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엄마는 너 키우려고 일도 그만뒀잖아."

몇 초의 정적이 흐르고 나서, 아들이 말했다. 

"엄마, 다시는 그 말 안 하면 좋겠어. 그때 나는 겨우 일곱 살이었어. 엄마는 몇 살이었어?"

"엄마? 서른다섯 살이었나?" 내가 대답을 했다.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성인이 내린 결정을 왜 자꾸 일곱 살짜리랑 그 책임을 나누자고 하는 거야?

 성인인 엄마 자신의 결정이었고, 스스로의 책임 아니야? 후회를 해도 그건 엄마 몫이야."


"...... 그렇게 말하면, 그래 너 말이 맞아" 나의 말끝이 흐려졌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고심 끝에 나는 사표를 내고 전업주부를 선택했다.

"이제부터라도 엄마 인생을 살아. 누구 엄마로 살지 말고, 엄마 이름으로 살아."

"나는 이번 생은 글렀어. 너 엄마로 살 거야." 

아들에게 지기 싫은 마음에 유치하게 대답을 했다. 우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엄마 이름? 내 이름? 


아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그날부터 나는 생각이 많아진 것 같다. 

사실 '자아 찾기'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 시간부터였다. 

하지만, 열일곱 살의 아들 그러니까 '17년'의 시간이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나의 선택으로 세상을 만난 아이에게, 나에게 가장 큰 행복과 사랑을 선물한 아이에게 정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와는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잘난 사람'이기보다는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무엇보다 자신을 제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내가 자라면서 듣지 못했던 '너는 소중해. 사랑해. 고마워. 너는 할 수 있어. 괜찮아....' 이런 말들을 아끼지 않고 해 주면,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맞벌이, 남편과 둘이서 아이 한 명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양가 부모님 누구도 도와주시지 않았다. 분만휴가로 3개월을 완전히 쓰지도 못한 채, 백일도 안된 아가를 보모에게 맡기고 복직을 했다. 낮시간만 봐주신다고 해서 간호사로 3교대 근무를 하면서 키우자니,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밤근무를 하는 날에는 남편이 밤새 아이를 보고 출근을 했다. 한 사람 월급은 보모에게 다 들어갔어도 버틸만했지만, 아가가 아프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음이 너무 아파 울면서 일했던 기억도 있다.

아가가 26개월 됐을 무렵 12시간을 봐주는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고, 나도 상근으로 부서가 바뀌었다.

6시에 퇴근을 하고 지하철을 타면, 어린이집에 7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운동화를 가방에 넣고, 지하철에서 내릴 때면 구두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전력질주를 했다.

내 아이가 마지막 하원생인 게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늘 내가 꼴찌였다. 

선생님과 둘이 놀다가 퇴근한 엄마를 보면, 선생님과 교실 등을 끄고 나오던 세 살짜리...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사직을 결심했을 때 직장에서는 모두가 이제 다 키웠는데 왜 그만두냐고 사직을 말렸다. 나는 아이를 낳고 7년 동안 직장인으로도, 엄마로도 어느 쪽도 완벽하지 못한 내가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완벽할 수가 없다. 그리고, 완벽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7년 동안 외로웠을 아이에게, 또 남은 시간도 버티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이면 엄마가 우산도 갖다 주고, 간식도 같이 먹고, 아프면 엄마랑 집에서 쉬기도 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함께 해보고 싶었다. 내가 쉬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되면, 경제적인 부족함을 다들 우려했지만 그걸 어린아이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결정했고, 나는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3개월 전에 사직을 했다.


그렇게 온전히 10년을 아이와 함께 보냈는데, 막상 아이가 자신의 영역을 긋는 순간이 오니 서운했다.

선을 그었으니, 이제 벽을 쌓아 올릴 테고, 점점 그 벽은 높아지고 두꺼워질 거다.

그리고 아이 눈에도 온전한 '나'로 살고 있지 않는, 자아가 없는 엄마인 걸 들켰다는 게 고민이었다.

'엄마도 그러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이번 생은 글렀어"라고 어린아이처럼 대답해 버리다니...

내 인생을 포기했던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시간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아이를 통해서 내 삶을 재부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의 나를 인정하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엄마 이름으로 살아'

'내 이름이 뭐였더라'

'누구의 엄마'였었는데, 그 아이가 내 이름표를 떼어버렸다.

'이제 누구 이름으로 살지..?'


BTS 노래처럼 "Love Yourself" 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이름이라도 좋아해야 할 텐데, 이름부터 싫으니까.

그렇게, 아들이 서랍을 열어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랍 속에 넣어둔 자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