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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만 Mar 10. 2019

난파선에서 구조된 연인

메콩강


그렇게 우리는 노를 놓고 흘러서, 노를 놓은 지 몇 분 만에 태국의 수풀에 처박히고 말았다.

인적이라고는 보이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패트가 뭍으로 올라섰다.

뗏목이 움직이지 않게 패트가 진흙에 고정시켜 놓은 막대를 붙잡고, 나는 완전히 진이 빠진 채로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여행을 꿈꿨는지 잠시 생각했다. 

꿈에 부풀어 뗏목에 살아있는 닭을 실어서 매일 달걀을 받아먹자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강물 밑 바위에 걸려 뗏목이 뒤집어졌을 때 악어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걱정을 하기도 하고, 한 명이 망설이고 주저하면 다른 사람이 북돋우면서 여기까지 왔다.

타켁까지 올라오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고, 뗏목을 만드는 데 또 일주일이 걸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시장에서 타이어 튜브를 사서 바람을 넣어 강물에 띄웠다. 그리고 드디어 꿈꾸었던 대로 우리가 만든 뗏목을 타고 메콩강을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오랜 시간과 열정이 수풀에 처박혀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 다시 한번 패트에게 하루만, 아니 한 번만 더 해보자고 말했어야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가 이것을 꿈꿔 왔고, 얼마나 열심히 준비해 왔는지를 상기시키면서 여기서 포기하지 말자고, 내가 내일은 좀 더 열심히 해보겠다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한 명이 쉬면서 체력을 비축하는 동안 다른 사람이 노를 젓는 식이 아니었다. 한 명만 노를 저으면 뗏목은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둘 다 노젓기를 멈추면 그대로 태국 모래사장에, 진흙에, 수풀에 처박혀 버렸다. 다시 말해 쉴 새 없이 둘이 같이 노를 저어야 했는데, 내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내 탓이었다. 배를 타는 것이 물에 뜨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저어야 하는 것이라는 걸 몰랐던 나의 무지였고, 미리 훈련하지 않은 나의 게으름 때문이었다. 나의 무지와 게으름이 1년 간 꿈꿔온 우리 여행을 여섯 시간 만에 끝이 나도록 만든 것이다. 나는 뗏목에 혼자 남아서 누렇게 일렁이는 메콩 강물을 바라보았다. 울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책하고 절망할 힘도 없었다. 정말 이렇게 끝이 난 거냐고 허망해할 힘도 없었다. 그저 패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 패트가 아리송한 얼굴로 돌아왔다.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가 승낙한 건지, 제대로 전달이나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한참 뒤, 저편에서 통통배 하나가 보였고, 우리는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난파된 우리를 구해줄 구세주였다.     


얼굴이 검은 그는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굵은 노끈 하나를 건넸다. 우리가 뗏목에 노끈의 한쪽 끝을 연결하자 그가 다른 쪽 끝을 그의 통통배에 묶었다. 

그의 통통배에 매달려 다시 라오로 향했다. 여섯 시간 동안 국경을 네 번이나 넘는 경험을 다시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뗏목의 마지막 @까만


우리는 뗏목을 모두 그에게 건네고 5만 킵을 건넨 후, 음식도 모두 주었다. 그는 가져가고 싶은 것이 있냐고 수신호로 물었다. 나는 방석을 가리키고, 패트는 대나무 매트를 가리켰다.

패트는 배낭에 대나무 매트를 매달고, 나는 배낭에 방석을 구겨 넣고 마을을 향해 걸었다. 해가 뜨겁게 내리쬈다. 

“절에 가자.”

우리는 뗏목을 타고 오면서 본 큰 절로 향했다. 가방은 물을 먹은 것처럼 무거웠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와 키득거렸다.

“First day and last day of Mekong adventure.”

그가 말했고, 우리는 같이 웃었다. 조금은 실성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끝이 났다 @까만


큰 절의 입구에서 표를 파는 청년은 2012 VISIT LAO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 절에서 묵을 수 없어요.”

청년은 우리에게 마을 안에 위치한 작은 절을 알려 주었다. 우리는 청년에게 라오 말로 ‘이 절에 묵게 해 주세요.’라고 써 달라고 부탁했고, 청년은 친절하게도 우리 이름을 물어보고는 우리 이름까지 라오스 어로 써 주었다.

우리의 이름과 함께 재워 달라는 요청이 담긴 종이를 들고 우리는 작은 절로 향했다.     


작은 절의 늙은 스님은 종이를 읽더니 끄덕였고, 옆 건물을 가리켰다. 방갈로처럼 보이는 나무 건물은 중간이 뻥 뚫린, 나무 지붕이 덮인 나무 평상 같은 구조였다.

두 개의 건물 사이에 놓인 커다란 통에 물이 담겨 있었고, 우리는 바가지로 물을 떠서 손과 발, 얼굴을 씻었다. 

닭이 우리 옆을 이리저리 오가며 모이를 쪼아 먹었다. 

또 다른 늙은 스님과 열다섯 살쯤 돼 보이는 어린 스님이 웃으며 다가왔다. 스님들은 우리에게 이불과 베개를 건네주면서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우리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우리를 받아준 작은 절 @까만


2012 VISIT LAO 티셔츠를 입은 청년이 일을 마치고 절에 찾아왔다. 청년은 지금 영어시험을 보러 가야 한다면서 시험을 마치고 저녁 9시에 자신의 집에서 만나서 놀자고 했다. 

그러자고 우리는 말했고, 시계 알람까지 맞췄지만 저녁 여섯 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열두 시간을 내리 잤다. 

나무 지붕 아래, 나무 바닥 위, 불상 앞, 나무 계단 옆에서 있는 옷을 모두 껴입고 침낭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잤다. 몹시 추웠고, 나는 여기저기에 똥을 싸는 꿈을 꿨다.


아침에 큰스님이 올라오셨다. 우린 잠이 덜 깬 채 침낭에서 몸을 반만 꺼내서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싸 바디, 싸 바디.”

한 명, 두 명 할머니들이 김이 나는 음식들을 잔뜩 싸들고 와서는 상을 차렸다. 모두 다 모인 할머니들은 열 명이 넘었고 우리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둘러 침낭에서 몸을 꺼내 주변을 정리하고 앉았다.

어린 스님과 늙은 스님은 할머니들보다 늦게 올라왔다. 가방에 가득 음식이 들어 있었다. 시주였다.

스님들은 상을 받고 나서 불경을 외웠고, 우리에게 빵이며 과일을 하나씩 주었다. 할머니들은 스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남겨준 세 개의 상 중에 한 개를 우리에게 주었다. 따뜻하고 맛있는 밥상이었다.

할머니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어떻게 밥을 먹는지 계속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나는 뭔가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파이, 흥아”라고 말하면서 노를 저어 보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라오스 여자애에게서 배운 ‘배를 젓다’라는 라오스 어였다.

할머니들은 일제히 떠들면서 웃었다. 우리는 카메라를 꺼내 사진도 보여줬고, 할머니들은 돌아가면서 열심히 우리 뗏목을 보았다.     


전날 밤에 우리 소문이 퍼졌는지 그 지역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여자가 절을 찾아왔다. 

우리는 여자에게 배를 만들어서 떠내려 온 이야기를 했고, 여자는 할머니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통역해 주었다. 할머니들은 모두 박수를 치면서 웃었다.

“I will help you.”

우리처럼 난파당한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듯이 여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고맙다고, 도시로 가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여자는 다시 한번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침 아홉 시, 우리는 여자가 알려준 작은 트럭 택시에 탈 수 있었다. 여자가 일러준 곳에서 내려서 택시 운전사에게 사바나켓으로 가는 버스를 묻자 기사가 자신의 차를 다시 타라고 했다.

그는 우리를 작은 마을에서 내려주고는, 이런저런 사람과 이야기를 하더니 사바나켓으로 가는 버스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5백만 킵을 써서 보여줬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우리는 걷기로 했다. 아저씨는 배낭을 고쳐 메는 우리를 불러서는 사바나켓이 50km라고 했다.

50km라는 건 거짓말 같았지만 우리는 그곳이 어딘지조차 몰랐으니 방법이 없었다. 여자가 일러준 곳에서 그냥 내렸어야 했다. 택시운전사가 우리를 더 멀리로, 우리끼리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곳으로 데려온 것만 같았다. 

우리는 흥정하려 했으나 그들은 완강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그와 라오스 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우리는 점점 지쳤고, 결국 4백만 킵에 사바나켓까지 가기로 했다.     


작은 봉고차로 갈아탔다.

흙먼지가 차 안에 들이닥쳤다.

차 안에 타고 있는 누구도 창문을 올리지 않았다.

우리는 얼굴에, 옷에, 배낭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사바나켓으로 향했다.     


사바나켓에서 우리는 서둘러 숙소를 잡고 거리로 나왔다. 강변의 거리 식당에서 한 여자가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치킨! 파파야 샐러드!”

우리는 여자에게 그렇게 달라고 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자가 시키지도 않은 물병 두 개를 가져왔고, 우리는 한 개면 된다고 한 개를 돌려보냈다.

파파야 샐러드에서는 피시 소스 맛이 강하게 났다. 우리는 한 입씩을 먹고는 더 먹지 않았다.

“What do you want to do?”

“I don't mind.”

나의 질문이 그의 질문이었을 것이고, 그의 대답이 나의 대답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치킨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갈라놓은 머리가, 닭발이, 오돌토돌 올라온 살이 징그러워 나는 먹던 치킨을 내려놓았다. 대신 치킨과 함께 나온 볶은 야채를 입에 넣었는데, 도저히 삼킬 수 없게 맛이 역해서 강변에 대고 모두 뱉었다. 내가 음식을 뱉는 걸 처음 본 패트는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어섰다. 여자는 6만 8천 킵을 달라고 했다. 타켁 거리 식당에서 볶음 국수 2인분을 7천 킵을 주고 먹었던 우리는 아무 말 없이 6만 8천 킵을 냈다.     


길을 걸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습관처럼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었지만 사진을 찍지도 않았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지도 않았다. 

모든 풍경이 색을 잃었고, 전혀 매력이 없었다. 완전히 빛을 잃은 라오의 도시에서 우리는 아무런 욕망도 열정도 없이 그저 걷고 있었다. 

“Do you think we got lost?”

오랜 침묵을 깨고 내가 패트에게 물었다. 패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게 나를 절망하게 할까 봐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절망하고 있었고, 그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다.

“I feel lost. That's what I feel.”

패트가 담담하게, 그래서 몹시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언제였을까. 우리가 같은 절망을 느끼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봉고차에 옮겨 탈 때부터? 돈 덩어리 관광객 취급을 당하며 이상한 사기에 휘말린 그 순간부터? 뗏목을 뱃사공에게 넘기고 킬킬거리며 걸었을 때부터? 아니면 수풀에 처박힌 뗏목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을 때부터? 뗏목이 같은 자리에서 돌 때부터? 

중요한 건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이젠 어디에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나는 사실 절에 더 머무르고 싶었어.”

“그래, 절에 가자.”

“절에 가서 청소를 하겠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매일 불경을 듣는 거지.” 

“타켁의 절에서 스님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도 있을 거야.”

우리는 다시 기운을 찾았고, 타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타켁의 절에서 머무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자. 우리는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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