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캄보디아
우리는 다시 타켁에 도착했다. 배낭을 멘 채로 바로 절을 찾은 우리는 얼굴을 아는 스님을 발견했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여기 머무르면서 일을 돕고 싶어요.”
우리의 말에 그는 큰스님께 여쭤보겠다고 했다. 큰스님께 다녀온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큰스님이 안 된다고 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때 배가 많이 나온 큰스님이 밖으로 나와 우리를 힐끗 보더니 우리가 손을 모아 인사하는 것을 받지도 않고 절을 가로질러 갔다. 계속 우리를 돕고 싶어 했던 스님은 안타까워했다.
“우리가 옆 호텔에 머무르면서 매일 와서 영어를 가르치고 청소를 하는 건 어떨까요?”
그의 표정이 다시 밝아지면서 그건 괜찮을 거라고 했다.
마침 수업이 끝났고, 어린 스님들이 몰려와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큰스님을 찾았다. 큰스님은 절의 한편에서 새로운 건물을 짓는 공사를 감독하고 있는 듯했다. 배낭을 메고 큰스님 뒤에서 한참 기다렸으나 그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 다가가 “Can we talk to you?”라고 물었다.
큰스님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젓고는 공사장 인부들에게 다른 지시를 내렸다. 그는 단 한 번도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거지로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거지에 대한 그의 무례에 대해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할까? 잔뜩 부른 배를 두드리며 새 건물에 집착하면서 절을 찾은 손님에게 눈인사 한 번 하지 않는 오만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
몹시 화가 났지만 동시에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그저 엉거주춤 뒤에 서 있다가 그대로 절을 나섰다.
뗏목의 구조를 그리고 강물을 속도를 구하던 메콩호텔 114호 키를 다시 받아들고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Nobody wants me.”
패트의 말에 나는 내가 느끼던 정체 모를 감정을 그제야 알 듯했다. 우리는 거절당했고, 실패했다. 다른 삶을 살고 싶었고, 그것을 찾아 여기까지 왔지만 모든 것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캄보디아의 무료학교가, 뗏목이, 절이 우리에게 고개를 저었다.
“Even wind.”
패트가 덧보태면서 웃었다. 뗏목을 떠밀던 지독한 바람이 떠올라 나도 함께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슬펐다. 아주 많이 슬펐다.
“안아 줘.”
“나도 안아 줘.”
우리는 복도에서 서로를 꼭 안았다. 슬픈 내가 길 잃은 패트를, 절망한 패트가 상심한 나를 안았다.
“Maybe we were dreaming.”
우리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함께였다.
다시 팍세로 향하는 10시간 로컬버스. 우리는 내내 싸운다. 쿠션이 꺼진 의자에 앉아 속닥이다 싸우고, 점심을 먹기 위해 내린 사바나켓에서 다시 싸우고, 다시 등받이가 뻗뻗한 의자에 몸을 구겨 넣고는 또 싸우기 시작한다.
팍세, 늦은 저녁을 먹고 시내를 걷는다. 몹시 피곤하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말이라도 꺼내면 싸우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아서이다.
시엠립으로 향하는 15시간 버스.
패트의 생일이라 흔들리는 버스에서 엽서를 쓴다. 글씨가 엉망진창으로 휘갈겨진다. 나는 패트를 너무나 미워하고 있었고, 너무나 화가 나 있었다.
버스가 잠시 정차했을 때 음식을 사러 5달러를 들고 나간 패트가 늦게 돌아온다. 버스가 시동을 걸고 나는 소리쳐서 출발하려는 버스를 잡는다. 패트는 결국 손바닥만한 먼지 쌓인 봉지과자 두 개를 들고 와서는 잔돈이 없어서 못 받았다고 한다. 과자 두 개는 1달러도 안 할 게 틀림없다.
봉지과자 두 개를 먹으면서 또 다시 싸우기 시작한다. 그의 생일에 우리는 다투고 말을 하지 않는다. 시간이 잔인하고 느리게 흐른다.
다시, 캄보디아. 그리고 다시 펍스트릿.
우리는 재작년 12월 31일에 첫 데이트를 했던 식당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예전에 긴장과 호기심 속에 바라보던 서로를 기억했다.
“우리, 행복했던 순간들을 이야기해보자.”
그는 호주의 집에서 내가 그를 위해 차를 끓여 주던 날을 기억했다.
나는 그의 등 가득히 낙서를 했던 밤을 기억했다.
그는 한국의 어느 은행에서 내가 사우디 친구를 도와줬던 일을 기억했다.
나는 햇빛이 물에 부서져 반짝이던 수영장에서 그가 내게 수영을 가르쳐준 것을 기억했다.
그는 일요일마다 열리던 혜화 필리핀 마켓에 갔을 때를 기억했다.
나는 우리가 함께 흙탕물 속으로 손을 넣어 보던 것을 기억했다.
우리에겐 많은 기억들이 있었다. 그 기억들이 우리가 더 이상 떠내려가지 않도록 잡았다. 우리는 웃으면서 더 많은 기억들을 불러냈다. 그 기억들이 우리를 붙잡고, 꽁꽁 묶어서, 떠받쳐 멀리로 태워 갈 때까지.
가족과 친구들의 선물을 샀다.
패트는 머리를 잘랐다.
돼지귀를 잘라 넣은 샐러드를 길에서 사 먹었다.
게스트하우스 식당에서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캐나다 남자는 지난달에 멕시코를 여행한 이야기를 해 준다. 시내 백화점 건너편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백화점 주차장에 트럭이 서더니 사람 머리 열 개를 던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시 트럭이 떠났어. 아무렇지도 않게.”
독일 남자는 브라질을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식당에서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말다툼을 하다가 남자가 여자의 어깨에 칼을 쑤셔 박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여자는 셔츠가 다 젖도록 피를 흘리며 식당을 나섰고, 남자는 여자를 뒤따라갔다고 한다.
벨기에 여자는 페루에서 다섯 달 동안 봉사활동을 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남미가 위험하다고들 하지만 자신은 매우 안전하게 느꼈다고 한다.
“그저 딱 한 번, 도둑이 가방을 빼앗으려고 나를 뒤에서 잡아당긴 적이 있었을 뿐이야. 그때 넘어지면서 머리에 피가 났는데, 그게 다였어. 옆 친구가 도둑을 발로 찼고, 도둑은 도망갔거든.”
이탈리아 여자는 캄보디아 NGO에서 일하는 이야기를 한다.
“여기는 너무 흙먼지가 심해.”
여자는 캄보디아에 살고 싶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흙먼지가 날리는 곳에서 왜 살고 싶어 하느냐고 묻는다.
다시 무료학교를 찾았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작은 마을, 콕트넛. 그곳의 무료학교에는 샤워장이 있다. 다섯 개의 교실이 전부인 작은 학교에 샤워장이 있는 게 이상해서 댄에게 물었더니 머리를 감고 손톱을 자르고 옷을 빠는 것을 가르친다고 했다.
“아이들은 머리에 이가 있어. 그리고 때가 낀 손톱으로 밥을 먹고.”
아이들이 더러운 옷을 입고 학교에 오면 학교에서는 깨끗한 교복을 주고 자신의 옷을 빨도록 시켰다. 아이가 집에 갈 때쯤엔 옷이 다 말라서 깨끗한 옷을 입고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어떻게 머리를 감는지, 어떻게 손톱을 자르는지, 어떻게 옷을 빠는지를 가르치는 곳은 학교가 아니라 집이다. 그러니 그곳은 700명의 아이가 사는 집이다.
돌아가기 전에 다시 패트가 좋아하는 장님 마사지사를 찾았다. 그는 우리를 목소리로 알아 보았고, 우리는 마사지 대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어린 딸과 아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의 학교를 찾았다. 아가페학교. 학생들은 까만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띄엄띄엄 한국어를 했다.
“학교에는 380여 명의 학생이 있어요. 그런데 월급이 적어서 한국인 선생님이 없어요.”
얼마냐고 묻자 한 달에 50불이라고 답한다. 그럼에도 나는 일하고 싶었다.
“제가 일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수줍게 웃었다.
나는 그곳에 다시 가게 될까? 그곳에서 한 달에 50불을 받으면서 수줍게 웃는 선생님과 함께 380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될까?
우리가 학교를 다 보고 나오자 장님 마사지사는 우리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의 집은 창고 같은 방 한 칸에 매트리스를 깔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방 한구석에 작은 신전이 모셔져 있었다. 그렇게 가난한 집에 초대되어 본 적이 없는 나는 괜히 코가 시큰해졌다.
다리를 저는 아내가 맹물 두 컵을 내왔다. 우리 옆에 가만히 앉은 어린 딸은 엄마를 닮아 매우 아름다웠다. 아버지는 한 번도 그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내게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상호를 써 달라고 했다. 영어 이름은 Angkor Massage by blind였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 볼펜을 꾹꾹 눌러, 획을 몇 번씩 겹쳐 그어가며 상호를 썼다.
앙코르 마사지
한 시간에 5달러 (선풍기)
한 시간에 8달러 (에어컨)
장님 마사지사
장님 마사지사를 마지막 줄에 적어 넣은 내가 부끄러웠다.
남자는 오늘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고 했다. 남자와 낡은 건물의 계약은 곧 끝날 것이고, 그때를 대비해 포장되지 않은 흙길에 놓인 남자의 집에는 Angkor Massage by blind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내가 쓴 한국어 상호가 붙게 될 것이다.
내가 상호를 쓰는 동안 여자는 마당의 망고나무에서 녹색의 망고를 따왔다. 슥슥 썰어서 소금과 같이 내주었다. 아직 익지 않은 망고는 시었다.
장님마사지사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내가 바보 같다고 여기면서 그 집을 나왔다. 바람이 불어 빨간색 흙먼지가 일었다.
에필로그
우리는 지금 한국에 있다.
각기 직업을 가지고 있고, 다른 곳에서의 다른 삶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몇 번의 헤어짐의 위기를 겪었다.
한 번은 꽤나 심각해서 이제는 정말 헤어지자고 합의를 했을 때였다. 패트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여자가 같이 뗏목을 만들어서 메콩강을 여행하자고 하겠어.”
그런 여자가 있기는 하겠지만 많지는 않을 테고, 찾기는 더욱 힘들 터였다. 그건 내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뗏목이 우리를 헤어지지 못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헤어지지 않은 우리는 볕이 잘 드는 마당에서 전통혼례를 올렸다. 혼례를 치르기 전, 나는 문득 두려워져서 패트에게 물었다. 삶의 답을 찾았느냐고. 패트는 잠시 나를 보더니 이내 내가 뭘 묻는지 알아챘다.
“답은 모르겠고, 우선은 너와 같이 있으려고.”
우리는 그렇게 같이 있다.
여전히 삶의 답을 찾으면서.
매일 절망하고, 그래도 같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