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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견이 아니라 참석이거든?"

by 성소영


글 쓰고 공부하는 기혼여성 모임 ‘부너미’의 일원인 덕분에 나는 진짜 멋지고 용감한 엄마들을 많이 안다. 아기의 성씨를 자기 성으로 결정한 엄마, 시원하게 삭발을 하고 “이건 남자 머리, 여자 머리가 아니라 내 머리야”라고 말하는 엄마, 팔레스타인 집단 학살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엄마 등. 갑갑한 사회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누구나 자기 삶에서 활동가가 될 수 있다’는 글쓰기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곤 했다.


아이가 나를 이름으로 불렀을 때, 그러니까 “엄마”가 아니라 “성소영”이라고 호명했을 때 흔쾌히 그러라고 허락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일찍이 멋진 엄마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반말을 쓴다고. “엄마아빠와 자녀, 어른과 아이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아이와 내가 구조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서는 가장 쉬운 방법이에요.” 그 말이 너무 좋아서 마음 깊숙이 담아두었으니 아이의 호명이 내심 반갑기까지 했다.


엄마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아이는 더 적극적으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소영아 나 그네 밀어줘, 소영아 슈퍼 가서 아이스크림 사자. 소영아 사랑해. 그렇게 말하고는 언제나 손으로 입을 감싸고 킥킥 웃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어린 내가 이렇게 나이 많은 엄마를 친구처럼 부르다니! 매일 잔소리하고, 혼내기 일쑤인 엄마를 이름으로 부르다니! 보이지 않는 권력을 무너뜨린 쾌감이 밀려오는 와중 웃음이 새어나오는 건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자고로 동방예의지국 아니던가? 마음 한편으로 걱정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슈퍼에서 엄마의 이름을 부르는 아이를 보고 평소 인사를 나누던 이웃 주민이 가벼운 꾸중을 한 것이다. 엄마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아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멋쩍어진 나는 놀이를 하는 중이라고 변명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허락한 일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왔지만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오해하게 두는 것도 싫으니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면서.


아이를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한 명의 개인으로 존중하려고 노력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존중받는 어린이였던 경험이 별로 없어서일까, 솔직히 말하면 적당한 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호칭은 깍듯하게 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은 건 괜찮은가? 반대로 행동이 예의 있고 사려 깊어도 친구처럼 어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안 되는 걸까? 외국에는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이름을 부르고 친구 되는 문화가 있다지만 나는 한국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어서 사회적인 시선을 외면하기가 어렵다.


그럴 때마다 타산지석으로 삼는 건 아이의 말과 행동이다. 우리 부부가 진지한 대화를 하는 순간순간, 아이는 기어코 따라와서 제 이야기를 한다. 어느 날은 아이가 계속 끼어드는 통에 짜증이 난 내가 “어른들 말하는데 참견하지 말아 줄래?”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아이가 대꾸했다. “참견이 아니라 참석이거든?” 너무 맞는 말이라 말문이 막혔지만,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지식한 어른이 되어 말했다. “어른들이 중요한 대화하는데 끼어드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야.” 아이가 또다시 대꾸했다. “얘기할 때 한 명만 안 끼워주는 게 더 나쁘거든!“ 카운터 펀치 두 방에 넉다운이 된 나는 곧장 아이에게 사과했다. 예의 없다고 혼내는 대신 규칙을 정했다. 두 사람이 말하고 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무작정 끼어들지 않고 손을 들기. 억울하다고 엉엉 울던 아이가 그제야 눈물을 멈추고 동의했다. 진정한 권위는 억압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웃 어른에게 핀잔을 들은 그날 이후, 아이는 더 이상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어디서나 칭찬받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이는 어린이에게 꽤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집에서는 엄마 이름을 마음껏 말해도 괜찮다고 해도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이 또한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겠지만 그 물러남이 내심 아쉽다. 제가 허락한 일이에요, 이름을 부르는 게 뭐 어때서요,라고 용기 있게 말할 걸 그랬나…


“엄마는 아이가 꼭 어른들 말을 잘 들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아이보다 부족한 어른도 많아. 아이들은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게 많을 뿐이지, 어른보다 부족하거나 모자란 게 아니야.”


괜히 미안한 마음에 몇 마디 덧붙였을 뿐인데 아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혼내는 거 아닌데 왜 울어? 놀라서 묻자 귀에 대고 속삭인다.


“너무 감동이라서…”


어른이나 애나 자기 존재를 인정해 주는 말 앞에서는 눈물이 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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