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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나서 광복절"

by 성소영

아웃백에서 외식을 하던 날, 식전에 나온 부시맨 빵을 보고 아이가 말했다. “이 빵은 미끄럼방지가 되어 있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고 하니 빵 바닥에 동글동글 패턴처럼 난 트레이 자국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그 사고의 과정을 알아챈 순간 남편과 동시에 폭소가 터졌다. 올록볼록한 빵 바닥을 보고 미끄럼방지를 떠올리는 기발함이라니! 요즘은 아이의 말을 듣고 웃는 날이 참 많다. 오늘은 그 말들을 적어볼 요량이다.


맨 처음 생각나는 말은 바로 이것. “똥참…아? 엄마! 도로에서는 똥을 참아야 한대.” 가평으로 여행을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던진 말이다. 막 한글을 익히기 시작했던 6세 때, 아이는 세상의 비밀을 파헤치러 온 용사처럼 온갖 간판과 전단지, 안내문을 빠짐없이 읽고 다녔다. 그런 아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참외 농장에서 붙인 <똥참외>라는 안내판. ‘외’라는 글자가 낯설었는지 아이는 “똥참…”까지 말하고는 한참만에 ‘외’를 “아?”라고 읽고는 그럴듯한 결론을 내렸다. ‘도로에서는 똥을 참아야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용변을 참지 못해서 실수하는 날이 잦은 어린이였으니 꽤 합당한 추론이었다.


“빛을 되찾았다니 좋은데? 나는 신이날 때마다 광복절이라고 해야겠다.” 이것은 아이가 지난해 8월 15일에 했던 말이다. 광복절에는 왜 유치원을 안 가냐는 물음에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남편이 한자의 뜻풀이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말이 아이의 마음에 꽂혔나 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거 알지? 광복절은 일본에서 벗어나서 나라를 다시 찾은 날이야. 아주 중요한 날이니까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쉬는 거지. 한자로 ‘빛 광(光)’, ‘다시 복(復)’을 써서 ‘빛을 되찾았다’는 의미야.”


그날 하루종일 아이는 놀이터에서도 광복절! 밥을 먹으면서도 광복절! 인형 놀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광복절!을 외쳤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지만, 아쉽게도 이 말의 유통기한은 단 하루로 끝났다. 어감이 낯설고 어려운 한자어라서 그런지 푹 자고 일어나서는 깨끗이 잊어버린 것이다. 8월 16일부터는 아이의 입에서 광복절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는데, 과연 올해의 광복절에는 무슨 말을 할 지 기대가 된다.


요즘 아이가 가장 귀여운 순간은 손을 씻을 때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아이는 곧장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생일 축하 합니다.” 노래가 끝나면 뒤이어 “와아아아!”하는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7세 반이 되어 유치원 선생님께 새로 배운 것이란다.


“엄마, 손을 30초 씻어야 세균이 다 죽거든? 그런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면 딱 30초야.”


“그럼 “와아아아”는 왜 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서 손을 털면 재밌잖아…히히”


요즘은 나도 손을 닦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와아아 하면서 손에 물기를 털면 왠지 흥이 나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아이처럼 소리내어 노래를 부를 자신은 없지만….


어느 날은 아이가 다급히 뛰어와 말했다. “나 다섯 글자로 된 예쁜 말 또 찾았어.” 아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다섯 글자 예쁜 말>이라는 동요를 자주 불러주었는데 유치원에서 다시 들으니 감회가 남다른 모양. 며칠간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름다워요.”하고 노래를 부르더니 새로운 말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좀 웃겼다. “천만합니다”였기 때문이다. 내가 푸하하 웃자 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왜 웃어. 미안한 사람한테 괜찮다고 위로하는 거니까 예쁜 말이지!” 유치원 영어 시간에 “You’re welcome”을 배운 날이었다.


이외에도 “내가 심심당부(신신당부)할게”, “엄마는 진짜 막상막하(막무가내)야”, “주차장에 가려면 차량 엘리베이터(하향 엘리베이터)를 타야지”, “다리는 철이랑 끈끈이주걱(콘크리트)으로 만들어”처럼 귀여운 말실수를 해서 나를 웃기는 날이 참 많았는데, 유치원의 최고참 형님인 7세가 되니 어처구니 없는 말실수가 줄어서 아쉽다.


대신 요즘은 수수께끼를 풀듯 아이가 잘못 말한 단어의 뜻을 유추하는 날이 많다. 유치원에서 들은 고급 어휘를 기억했다가, 적절한 순간에 아는 체를 하고 싶은데 아직 7세의 기억력은 야심을 못 따라가는 듯 하다.


“엄마, 하모는 진짜 나쁜 거야. 하모는 하면 안 돼.”


“하모? 하모가 뭐야?”


“그거 있잖아. 막 자기랑 다른 사람을 싫어하고 괴롭히는 거.”


“아… 혐오?”


“아 맞다. 혐오!”


벌써 혐오라는 단어를 배울 만큼 컸나 문득 아쉽고 기특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로부터 5분 뒤, 가만히 앉아있는 엄마에게 다가와 아이가 말한다.


"엄마! 다른 사람을 이유없이 미워하는 말이 해마라고 했지?"


아무래도 웃을 수 있는 날이 아직 한참 더 남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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