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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는 20분이 필요해."

by 성소영

불안할 때는 달리기를 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끝없이 이어지다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나를 사로잡으면 곧장 운동화를 신고 공원에 나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이십 분쯤 뛰다 보면 어느새 불안이 사라져 있다. 한 뇌과학자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달리기를 할 때 잡생각을 멈추고 달리는 행위에만 집중을 하게 된다고 한다. 오랜 진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에 달리기를 했기 때문이다. 호모사피엔스가 육식동물을 피해서 달렸다면 나는 불안을 피해서 달린다. 둘 다 무사히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만큼은 똑같다.


십 년 전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늘 경미한 우울증이 있었다. 일이 많으면 번아웃이 오고, 일이 줄어들면 다음 달이 걱정돼 잠이 안 왔다. 시간과 계절이 흐르는 것을 모르고, 지하철 스크린도어 너머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즈음 나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날 이후 신경안정제를 먹고 심리상담도 받았지만 일시적이고 미약한 효과가 있을 뿐이었다. 상태가 악화되었다가 괜찮아지기를 수 년째 반복하며 이 정도 불안과 우울은 반려질병인 양 여기기로 했다. 매 순간 타인의 평가와 선택을 받는 사람의 운명이겠거니 싶었다.


삶의 기저에 잔잔히 깔려 있던 우울과 불안을 다시 증폭시킨 것은 출산이었다. 심신이 건강하던 사람도 아이를 낳으면 산후우울증을 앓기 마련이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아이를 낳은 2019년은 코로나19가 우한폐렴이라고 불리던 시절이었다. 낯선 병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타인의 손을 빌리지도, 아이를 기관에 맡기지도 못한 채 혼자서 육아를 도맡아 했다. 그와중에도 일을 놓지 못해 남편이 퇴근하면 곧장 서재에 틀어박혀 청탁받은 원고를 썼다. 몸과 마음이 축나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한 몇 년을 보내면서 나는 위태롭게 엄마가 되어갔다.


출산 후 6개월이 지나서부터는 나의 불안정한 마음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봐 중단했던 심리상담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아이가 안아달라고 매달리면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요”라는 나의 말에 비혼인 임상심리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는 내 상태가 심각하다고 말하며 상담 횟수를 늘리기를 권했지만, 엄마가 된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로지 나를 위해 돈을 쓰기에는… 상담료가 좀 비쌌다.


자연스레 아이는 엄마의 유약한 모습을 자주 보며 자랐다. 내가 불안을 애써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지금 불안해서 심장이 너무 빨리 뛰거든? 조금만 누워있을게.” 그러면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따라 옆에 누워서 노래를 불렀다. 세 돌이 지나고부터는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엄마, 불안하면 그냥 자. 말을 하지 말고 눈을 감아!” 그리고는 작은 손으로 내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것이다. 마치 내가 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 우리를 보며 남편은 염려스러워했다. 하루는 작심한 듯, 아이가 잠든 방문을 굳게 닫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 “제발 애 앞에서 불안하다는 말 좀 그만해. 엄마가 그러면 애는 얼마나 힘들겠어?” 나는 그저 솔직했을 뿐, 불안정한 마음을 빌미로 육아를 소홀히 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문득 죄책감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아무리 훌륭한 엄마라도 엄마의 역할을 운운하는 말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으니까.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작은 인간의 미래가 내 손에 달려있다는데 두렵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고 남편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육아에서 한발 비껴나있는 사람만이, 아이와 한몸인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태연하려고 노력해도 아이는 엄마의 불안을 기가막히게 알아챘다. 꼭 보이지 않는 탯줄이 내 마음과 아이의 마음을 여전히 이어주고 있는 것처럼. 이를테면 혼자서 잘 놀던 아이가 내 심장박동이 빨라지면 장난감을 내던지고 다가와 보채고 매달려서 기어이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상처받을 아이에게 미안해서 나는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투명하게 보여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불안을 말했던 건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좋은 엄마가 되고싶어서였다.


“엄마에게는 20분이 필요하지?”

그러던 어느 날, 식탁에 앉아 가만히 물을 들이키는 나에게 아이가 다가와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물으니 만화에서 보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블루이 엄마도 20분을 쉬고 나니까 괜찮아졌어.”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블루이>의 한 시리즈를 보면서 나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7살 강아지 ‘블루이’와 5살 강아지 ‘빙고’를 키우는 엄마는 매 시리즈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어쩐지 그날의 영상 속 엄마는 다소 지친 모습이다. 두 딸의 장난에 예민하게 반응하다가, “20분만 쉬어야겠어”라고 말하고는 아이들을 아빠에게 맡긴 채 방으로 들어간다. 블루이와 빙고는 그런 엄마가 내심 걱정스러우면서도 섭섭하다. ‘엄마는 우리가 없을 때 더 행복한 걸까?’


“엄마는 화나지 않았어. 너희가 보고싶지 않은 것도 아니야. 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건 힘든 일이거든. 그래서 가끔 20분이 필요할 때가 있어. 너도 크면 알게 될 거야.” 시무룩한 표정으로 방문 앞에 선 블루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엄마가 말한다. 그리고 20분이 지나자 방문이 열리고, 엄마는 다시 예전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엄마도 20분만 누워있어. 문 닫고 혼자 있어도 돼! 그럼 괜찮아질거야.” 그 말이 꼭 안정제처럼 든든하게 들렸다. 출산 전까지만 해도 돌봄은 나의 일방적인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클수록 그 생각이 얼마나 큰 오해였는지 깨닫는 순간이 많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은 틀렸다. 세상에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란 없다.


아이 앞에서 엄마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뉘앙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약한 엄마인 날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강한 사람은 아픔을 태연한 척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아파도 끊임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인간을 이해하는 품이 더 넓어지지 않을까? 나는 불안과 우울을 숨기지 않지만, 거기에 굴복하지도 않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것들이 내 삶을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수시로 운동화 끈을 고쳐 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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