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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Sep 16. 2024

평온했던 삶에 균열이 생겼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집을 샀다. 비록 집값의 30%가 대출이었지만, 겨우 24평짜리 낡은 아파트였지만 우리 집이 생긴 거다. 투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해 2년 만에 신도시에 내 집 마련이라니 ‘이것이 맞벌이의 힘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친구가 있었지만, 그를 부러워한 적 없었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반지하 자취방에서 탈출할 수 있었기에 시아버지가 마련해 주신 투룸도 나에겐 과분한 신혼집이었다. 게다가 우리의 내 집 마련엔 일종의 성취감이 더해져 더 뿌듯했다.     


 

남편은 나에게 월급봉투를 모두 맡겼다. 내가 한 달 생활에 대해 가계부를 정리해서 보여주면 남편은 본체만체하며 나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는 나를 많이 믿기도 했지만, 가계를 꾸려가는 그런 일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렇게 궁색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게 살았다. 주로 세일 기간을 이용했지만, 백화점에서 옷을 사 입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외식을 거하게 하기도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난 아이에게 돈 없다고 말하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신조 같은 거였다. 엄마의 돈 없다는 말을 내가 얼마나 지겨워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혼하고도 아이 갖기를 잠시 미뤄왔다.

‘이제는 아이를 가져도 되겠지? ’

임신을 계획하고 두 달 만에 임신에 성공했다. 임신 6주 차에 아이가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고 하고, 우렁찬 심장 소리를 들었다. 임신하고 좀 달라진 게 있다면 초고추장 잔뜩 묻힌 회가 자주 먹고 싶어 졌다는 것 정도? 나는 그 흔한 입덧도 하지 않았다.

임신을 핑계로 골치가 아픈 학생부터 정리를 하며 과외 수업을 절반으로 줄였다. 그렇게 하니 말 잘 듣는 학생만 남았다.

그렇게 정리된 시간에 피아노와 요가를 배우며, 태교에 집중하려 했다.      

내가 돈 걱정하지 않으며, 시간에 쫓기지 않으며 이렇게 여유로운 삶을 살다니!

태어난 지 29년 만에 처음으로 행복이란 단어가 내 것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걱정 없는 이 순간이 낯설었다.

‘내가 진짜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이른 새벽에 시아버지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깨어 병원으로 달려갔다.

바로 다음 주에, 형부가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불과 한 달만의 일이었다. 마치 세상이 나에게 ‘넌 행복하면 안 돼. 너에겐 행복이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도 너의 가족이긴 하지만, 너의 행복을 방해할 일들은 아니지 않냐고? 그로 인해 파생된 많은 일들이 나를 점점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나의 태교 계획은 한 달 만에 막을 내렸다. 임산부 대접은커녕, 양쪽 집에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한몫해야 했다.



형부가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할 때는 엄마와 함께 조카들을 돌봐야 했다. 조카들은 불과 세 살, 여섯 살이었다. 엄마 혼자서 어린아이 둘을 돌보는 게 너무 무리일 것 같아서 엄마와 아이들이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일이 줄어들긴 했지만, 나는 아직 일을 하고 있었으니, 엄마와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오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3주에 한 번 있는 항암치료 주기는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족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형부는 항암치료마저 효과가 없었고, 다른 트러블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더 많더니, 결국 석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을 돌보는 게 버거웠던 내 마음을 그가 알아차린 건 아닌지, 형부의 죽음 앞에서 난 조금 죄책감이 느껴졌다. 모두가 언니를 걱정하며 슬퍼하며 장례를 치르고, 언니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이사를 하며 엄마와 살림을 합쳤다.      



자살 시도를 해서 응급실에 실려 갔던 시아버지는 치매 판정을 받고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니, 시간을 내어 도시락을 싸 들고 요양병원에 찾아뵈어야 했다.      

그 와중에 남편은 음주 운전 사고를 냈다. 차를 사주면 돈을 더 많이 벌어오겠다던 사람을 믿고 차를 사주었더니, 1년도 안 되어 차를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사고 현장에서 차량을 끌고 간 레커차를 찾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카센터에서는 연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차를 뜯어 놓고 수리에 들어갔다.

음주 운전은 자차 보상을 못 받는다. 어차피 면허도 취소될 테니, 이런 상황에 많은 이들이 차를 쉽게 포기한다고 한다. 음주 운전이 잘못된 행위지만, 그런 상황을 노리고 일방적으로 차를 끌고 가 저들 맘대로 차를 분해해 버린 카센터를 그냥 놔둘 순 없었다.



이제 불러오기 시작한 배를 잡고 카센터를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차를 챙겨서 다른 수리업체에 맡겨 겨우 100만 원을 건졌지만, 벌금을 내기에도 모자란 금액이었다.

돈 걱정 안 하는 내 모습이 낯설었던 시간에서 불과 넉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남편에게 화가 났지만,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아버지(어머니는 새어머니였다)가 저렇게 무너지니, 그의 마음도 평온하지 못할 거라며 억지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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