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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Sep 17. 2024

출산에서 이혼까지 불과 1년

어느덧 만삭이 되었다.

여태 임산부로 불편함은 적은 편이었는데, 막달이 되니 아이의 머리가 치골을 눌러 밤낮으로 통증에 시달렸다. 제대로 걷기조차 불편했고, 밤에도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예정일을 2주 남겨놓고 병원에 갔을 때,

아이가 이제 세상에 나올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날부터 아이에게 제발 빨리 나오라고 사정을 할 정도였다.



예정일을 나흘 앞두고 진통이 왔다. 24시간을 진통을 앓다가 지쳐 제왕절개를 하기로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2주 전에 수술해서 아이를 낳을 걸 하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앞선 사건들이 보여주 듯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 아니던가.

그 모진 시간을 묵묵히 견뎌주고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난 것만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신생아의 일과는 먹고 자고 모빌을 쳐다보며 버둥거리는 게 전부였다. 아이가 우는 때는 배고플 때와 기저귀를 갈아줘야 할 때뿐이었다. 새벽에 깨어 한 번 젖을 먹여야 하는 것 말고는 크게 힘들게 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런데 아이는 백일이 지나자마자 점점 까칠한 아이로 변했다.           



아이의 까칠함은 낯가림으로 시작됐다. 백일이 지나 사물을 구별하는 눈이 생겼는지 엄마 이외의 사람이 자기를 안으면 악을 쓰고 운다. 아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자, 화장실에도 따라오고 샤워할 때도 늘 같이 있어야 했다. 세상에 누가 나를 이렇게 간절히 원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이에게 내가 ‘오직 하나뿐인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에 뿌듯한 마음도 들었지만, 화장실에도 따라오고, 샤워할 때도 늘 같이 있어야 하는 상황은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남편의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피해자를 만나고, 경찰서와 법원을 들락거리면서도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아이는 9개월을 지나고 있었다. 아이는 집에서 소파를 붙잡고 서는 정도이고 아직 혼자 서 있지 못했다. 잠시도 땅에 내려놓을 수 없는 상황인 거다.

백화점이나 병원, 마트 같은 곳의 여자 화장실엔 아이 기저귀를 갈 수 있는 칸이 있다. 일을 볼 때는 잠시 아이를 내려놓을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법원 화장실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다.           



때는 6월이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아이를 업고 다니며 사건을 하나씩 해결했다. 법원 직원이 나에게 안쓰럽다는 눈길을 보낸다.  낯선 이의 그 눈빛은 나의 이혼 결심을 더욱 굳건히 해 주었다. 이 남자와 함께 살다가는 난 언제 또 이런 동정의 눈길을 받아야 할지 알 수 없겠다.  



사고 처리를 마치고 남편에게 별거를 제안했다.

남편은 제 잘못이 워낙 큰 걸 아는지, 별거에 쉽게 수락했다. 그는 이혼만은 막아보겠다는 마음이었을 거다. 하지만 나의 최종 목적은 이혼이었다. 이혼 얘기를 꺼내면 남편은 분명 격하게 화를 낼 것이고, 돌도 안 지난 아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별거부터 제안한 것이다.



분당에서 춘천으로 이사를 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혼자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엄마 집 근처에 집을 얻었다. 살림을 나누어 이사하는 모습이 괜히 이삿짐센터 직원들 보기에 민망했다.

이삿짐을 다 싣고, 잔금을 받고, 은행에 들렀다가 춘천으로 오는 길인데, 이삿짐센터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짐을 다 정리해 놓았다고 언제 도착하냐는 재촉 전화였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보고 있으니, 혼자 다닐 때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은행 한 곳 들렀을 뿐인데 시간이 이렇게 지체됐다. 카시트에 앉은 아이를 내려 업고, 은행업무를 보고, 다시 업은 아이를 내려 카시트에 태우고 하는 동안 이삿짐은 다 정리된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이삿짐센터 직원들을 보내자마자, 아이 분유부터 챙겨주고 아이가 기어 다닐 방바닥을 닦는다. 하루 종일 물만 마시며 쌀 한 톨 넘기지 못했다. 시간도 없고 입맛도 없었다.      



환경이 바뀌면 울고 보채는 아이가 있다고 들었기에, 난 아이가 낯선 환경에 또 그 까칠함을 발휘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아이가 알아듣는지 모르는지 확신도 없으면서 아이에게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엄마랑 이제 둘이 사는 거라고.’ 방바닥을 닦으며 연신 일러 주었다. 아이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보채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서 남편에게 이혼 얘기를 꺼냈다.

남편은 가족이라는 끈이 이렇게 쉽게 끊어질 수 있는 거냐며 화를 냈다. 아주 많이.

쉽게? 쉬웠을까?

내가 만삭 때 힘들어할 때, 성매매업소를 들락거리지 않았다면 아니 최소한 나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너의 사고를 한 번은 더 참아주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가능한 한 냉정하고 덤덤하게 말했다.

펄펄 뛰던 남편은 긴 침묵 끝에 이혼에 동의해 주었다.

세상에 한 가지 이유로 이혼을 택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주변에 이혼한 사람을 보거든 제발 왜 이혼했냐고 묻지 않길 바란다.



그동안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여기까지 달려왔다.

법원에 가서 서류 정리를 마치고 나서야,

그날 저녁에 언니, 오빠, 엄마와 모였다.

그동안 나의 결혼 생활에 이마 저마한 애로가 있었고, 그래서 오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는 이야기를 가능한 짧고 담담하게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잘 사는 줄로만 알았던 가족들은 처음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멍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엄마가 내 말의 뜻을 이해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오빠도 당황하며 그동안 어떻게 한마디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냐고 탄식 섞인 말을 했다.



말을 했다면 뭐가 달라질까?  

이런 구질구질하고 추잡한 과정을 가족들과 의논하며 같이 한숨 쉬고 싶지 않았다.

언니의 경우처럼 '남편이 암에 걸렸어, 도와줘.'

하는 것과  '남편이 자꾸 사고를 쳐. 어떡하지?' 하는 것은 너무도 다른 얘기다.



말할 수 있는 슬픔은 그래도 견딜만한 것이다.

       


이제 겨우 돌을 넘긴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기만 한다. 이제 막 엄마라는 말을 배워 엄마만 부른다.

‘그래 엄마야. 나 아직 엄마라는 이름이 낯설지만 내가 네 엄마야. 그러니 최선을 다해 널 키울 거야. 누구도 너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지켜줄게.’     

다짐하며 잠을 청했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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