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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Sep 18. 2024

난 잘하고 있는 걸까

하필이면 이때 친구들의 결혼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그렇게 친하지 않아도 내 결혼식에 왔던 친구의 결혼식엔 참석해야 했다. 나 이혼했다고 ‘나 몰라라.’ 하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닌 거다.

다른 한 친구는 8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직후에 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아픔을 감추며 견디는 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거기까진 그래도 좋았는데 가장 친한 친구의 신랑이 함진아비 앞세우는 ‘함 사세요.’를 꼭 하겠다고 한단다. 친구도 기쁨보다 걱정이 앞서는 말투다.



엄마에게 아이를 잠시 맡겨두고 함을 받으러 갔다. 함을 등에 메고, 오징어 가면 쓴 함진아비를 일곱 살 때 동네에서 보고 처음 본다. 그 시절엔 마을에 함진아비가 뜨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 구경하곤 했지만, 아파트 생활이 일상이 되며 그 후엔 함진아비를 본 적이 없었다. 신랑 친구들이 정말 많이도 왔다. 친구네 부모님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수용가능한 인원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의 경사인데 난 이 시간을 같이 즐기지 못하고, 최대한 빨리 함진아비를 친구 집에 들여놓고 밤이 되면 엄마를 더 많이 찾는 아이에게 돌아가야 한다. 일곱 살 때 보았던 신부 친구들의 모습을 흉내 내며 숙제하듯이 노래도 하고 술도 따라주며 신랑 친구들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집으로 왔다.



다음 날은 친구의 결혼식이다. 조금씩 비가 내렸다. 아이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갔다. 내가 차에서 내리는 걸 본, 신랑의 친구들이 구면이라 반갑다는 듯이 우르르 우산을 들고 내 곁으로 왔다. 뒷좌석에 탄 아이를 안으니, 친구들은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놀라움과 실망 섞인 표정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당당하게 싱긋 웃었주었지만, 뒷맛이 씁쓸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신랑 친구들이 꽤 근사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한다. 불안했다. 우선 아파트 단지 로비에 과외 광고를 게시했더니, 몇 팀의 수업이 만들어졌다. 잠깐씩은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수업을 했지만, 계속 그러는 건 무리였다.

엄마는 이미 언니의 아이들을 둘이나 돌보고 있었다. 엄마에게 더 짐이 될 순 없다.

이 까칠한 아이를 맡아줄 만한 믿음직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일하는 시간이 워낙 들쭉날쭉해서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도 무리였다. 석 달 동안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적절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소방관 남편에 중학생 딸이 둘 있는 집이었다. 반찬값 벌이 삼아 워킹맘의 아이를 돌봤었는데, 그 아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아이와 함께 그 집에 가서 먼저 친해지기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육아의 달인인 그분은 까칠한 우리 아이를 30분 만에 자신의 품에 안기게 했다. 그 가정환경도 마음에 들었다. 육아라는 것이 아무리 능숙해도 혼자서 내내 아이를 돌보는 일은 친엄마도 지치는 일이다. 그런데 중학생 딸들과 이 교대 근무를 하는 남편이 사이사이 아이를 돌보아 주니, 아주머니는 힘들지 않게 아이를 볼 수 있는 환경이었다.   


   

덕분에 난 내가 바라던 계획을 하나씩 실행해 갈 수 있었다. 그 다음 시나리오 작가교육원에 등록했다. 이 와중에 무슨 공부냐고? 불과 서른의 나이에 난 이혼녀란 딱지를 붙였다. 몇몇 친구들을 제외한 모두가 나의 삶을 실패한 삶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만큼은 꼭 하고 싶었던 일에서 성공을 거둬야 한다는 강박이 깊게 몰려왔다. 현실적으론 아이 아빠가 양육비를 넉넉하게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 아빠가 주는 양육비로 생활비를 쓰고, 내가 버는 과외비로는 작가교육원 등록비와 여비로 사용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은 서울에 있는 시나리오 작가 교육원에 가서 공부했다. 아주 열심히!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운전하며 글을 어떻게 쓸지 고민했다. 돈을 주고 아이를 맡기며 얻은 시간이니, 나의 시간은 홀몸들의 시간보다 훨씬 알차게 써야 했다.

춘천에 돌아오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씻기고 놀아주다가 아이가 잠들고 나면 생각이 날아갈 새라 두려워 재빨리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그렇게 석 달을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일요일에 친구들과 남이섬으로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세 친구와 함께였는데, 모두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처지였다.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해 아이를 내려놓으니, 아이는 이리저리 막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는 이제 막 18개월에 접어들었다. 아이가 뛰는 걸 처음 보는데 어찌나 씩씩하게 뛰는지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마냥 신기하고 기특해 기분이 산뜻해졌다.

다음 날, 아주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아이가 뛰어다닌 지 꽤 됐다고 하신다. 활동이 많은 낮에는 아주머니와 함께 있고, 나와는 주로 밤에 씻고 자고 하는 게 전부였으니, 내가 알 수가 없었다. 뿌듯하면서도 착잡했다. 잘살고 있는 건지 불안했다. 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다 챙겨보지 못한다는 것. 이건 나뿐 아니라 모든 워킹맘의 딜레마일 것이다.      




그러다가 나를 더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 생겼다. 아이 아빠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아이를 보러 왔다. 아이가 어리기 때문에 아빠와 아이의 면접에 난 늘 보조처럼 따라다녀야 했다. 같이 밥을 먹고, 마트에 들러 장난감을 사고, 집으로 와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그 시간이 내키지 않았지만, 부자 사이를 생으로 갈라놓을 수도 없으니,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했다. 그렇게 돌아다닐 때는 아마 남들에게 평범한 가족처럼 보였을 것이고, 아이도 아직 엄마, 아빠가 어떤 상황인지 모를 때였다.

아이는 아빠가 오면 더 신나는 것 같았다. 와서 놀아주고 원하는 것들 다 사주니 싫을 리가 없었을 거다. 그러다가 아빠가 돌아갈 시간이 되면 아이는 또 쿨하게 아빠에게 작별 인사를 하곤 했는데, 한 번은

“아빠 좋아. 아빠 좋아!”

라고 하면서 악을 쓰고 운다. 아직‘아빠, 가지 마.’라는 말을 할 줄 모를 때였다.

이런 모습은 나와 떨어질 때만 보이던 모습이었는데, 아이의 갑작스러운 울음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이의 울음은 아빠가 떠나고도 한참 동안 계속됐다. 기저귀를 뗀 아이가 울다가 오줌까지 싼다. 아이를 달래다가 지쳐 아이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해 버렸다.

“엄마, 아빠랑 같이 사는 건 안 되니까, 네 마음대로 해.”

아이는 내 말 때문인지, 울다가 제풀에 지쳤는지 울음을 멈추었다.

아이를 씻기고 나니,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유병을 빨다가 잠들어버렸다.

잠든 아이의 모습을 보고 또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혼을 결심하는 사람들 모두 천 번 아니 그 이상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을 거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내린 결정이었음에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내가 나를 위해 아이의 행복을 뺏고 있는 건 아닌지 자책감이 또 밀려왔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죄인 된 기분으로 살아야 할지, 그땐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채로 그렇게 또 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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