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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Sep 19. 2024

몸이 아픈데 우울증이랍니다

작가 교육원은 세 개의 반이 있어서, 학기가 바뀔 때 원하는 강사를 찾아 전반이 가능했다. 연구반이 되었을 때, 옆 반에서 전반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친해지고 난 뒤에 그녀가 하는 말이,

옆 반에는 우리 반이 영화감독, 방송작가, 만화가, 번역가들까지 구성원이 다양한 어마어마한 반이라고 소문이 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애 엄마까지 있다고. 자기는 오자마자 애 엄마가 누구일지가 가장 궁금했는데, 그게 나라는 걸 알고는 조금 놀랐다고 한다.          

시나리오 작가 교육원인 만큼 앞에 언급된 직업들이 주목받는 건 이해가 됐지만, 애 엄마는 왜 언급된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같이 한참을 웃었다.

한참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에게 애 엄마는 다소 낯선 인물이었나 보다.



친구가 말했듯 우리 반엔 나름 잘 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나는 사실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옆 반에 난 소문처럼 영화감독은 아니지만, 조연출 출신인 분과 함께 스터디 그룹을 짜서 공부하면서 실제 현장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열심히 글을 썼다.

그 결과 수료식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신나는 수료식을 마쳤다.

수료식 전날 밤, 이전 학기 강사이셨던 선생님께서 심사위원 전원이 나에게 최고점을 주었다고 전화로 알려주셨다. 뭐 대단한 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넌 계속 글을 써도 돼.'라는 신호쯤으로 받아들였다.          



내 삶이 원래부터 아이와 둘이었던 것처럼 과거는 다 지우고 지금부터가 내 삶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2년을 정신없이 보냈는데, 수료식이 끝나고 나니, 시간이 좀 여유로워졌다. 하지만 그만큼 헛헛한 기분도 들었다.



잠을 푹 잤는데도 몸이 이유 없이 피곤하고, 어깨가 무거웠다. 내가 생각해도 그동안 나를 너무 혹사했다. 좀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한약을 지어먹었는데도 별 효과가 없었다.

이 정도 되니, 무슨 병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간이 안 좋으면 쉽게 피로를 느낀다더라. 당뇨가 있으면 쉽게 피곤해진다라.’

주변에서 이런 말들을 듣고는,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받아봤다.

검사 결과를 본 내과 선생님은


“아무 이상 없어요. 스트레스예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제가 한약도 먹고 다 해봤거든요.”


“한약 드실 돈으로 친구랑 놀러 다니세요. 누가 그렇게 힘들게 합니까?”


의사 선생님은 매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이렇게 몸이 아프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아이를 두고 마음껏 놀러 다닐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이렇다 할 처방을 받지 못한 나로서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몸의 증세는 나아지질 않은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얼마 후 우연히 건강 방송을 보다가 의사가 스트레스 때문에 아픈 거라고 말을 하면 반드시 정신과에 방문해 보라고 한다.

20년 전이다. 정신과, 우울증이라는 말이 거의 금기처럼 여겨지던 시절이기 때문에, 의사들이 정신과에 가라는 말을 대놓고 못 한다는 것이다.

딱 내 얘기였다.

난 집 앞에 있는 정신과를 찾아가 내 몸의 증세와 내가 정신과를 찾아오게 된 그 간의 과정을 설명드렸다. 선생님은 검사를 하시더니, 우울증 정도가 꽤 심각한 상태라고 하며 약을 처방해 주셨다.

약을 먹으니, 정말 놀라울 정도로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정말 신기해서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재발을 막기 위해 6개월 정도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친구의 추천으로 드라마 제작사에 들어가 일본 소설을 드라마로 각색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추천만으로 된 건 아니고, 대표 면접, 감수를 맡아주실 작가님이 내 원고를 보신 후에 결정된 일이다. 감수를 맡아주신 작가님은 정성주 작가님이다.          

드라마가 편성되기 전, 대본을 쓰는 동안엔 턱도 없는 약간의 진행비만 받을 수 있었지만 나 그땐 정성주 선생님이 내 원고를 읽으시고, 평을 하시고 그렇게 마주 앉아 글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꿈길을 걷는 것 같았다.

당시 선생님은 흔히들 말하는 슬럼프를 겪고 있었고, 그가 재기하지 못할 거라는 뒷말들이 많았지만, 촌뜨기였던 내 눈엔 지성과 미모를 갖춘 여신으로만 보였다.

(선생님은 그 후 세 작품을 연속으로 히트시키셨다.)          

일주일 동안 쓴 원고를 메일로 보내고,

다음 날 원고에 대한 평을 들으러 선생님 댁으로 간다.          



춘천에서 일산까지 달리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린다. 혼나러 가는 길이 이렇게 설레다니, 한 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데이트하러 갈 때, 이렇게 설레었던 적이 있었나?'

어린 날, 첫사랑 빼고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대로 우울증 약을 먹지 않았다.           

선생님은 내 원고를 보고,


“그러니까 네가 얘기하고 싶은 게 A잖아.”


“네.”


라고 대답하며,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 마음을 아시는 이!'

그런데 원고는 내 미숙한 표현으로 읽는 사람에게 A”로 읽힐 거라고 가르쳐 주신다.

조언을 바탕으로 열심히 원고를 수정해 보지만, 그래도 내 원고는 A'까지 밖에 이르지 못했다.     

문제를 찾아주시고, 대안을 제시해 주시는 선생님과의 회의는 즐거웠지만, PD들과 회의할 땐, 지적, 지적, 지적뿐이었다.

회의 테이블에 다들 옷을 입고 있는데, 나 혼자 알몸으로 앉아 있는 기분이다. 그러면서 '너는 왜 이리 배가 나왔냐, 또 가슴은 왜 이리 쳐졌냐.'라는 식의 얘기를 계속 듣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 이런 모욕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드라마 편성만 된다면!

하지만 반년이 지나도 드라마가 편성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거취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할 때가 되었다. 기다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통장은 어느 새 마이너스를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제작사 일을 그만두었다.



친구가 생각했듯, 애 엄마가 꿈을 찾아 달린다는 건 무리한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어깨가 아프기 시작했다. 다시 정신과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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