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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Sep 23. 2024

남편은 늘 해외출장 중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나 논술학원이나 해 볼까?”   

  

친구에게 푸념하듯 한마디 건넸는데, 다음 날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논술학원 원장이 갑자기 타지로 이사하게 되어 인수자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친구와 함께 그곳에 가 보았다. 작은 규모에 초, 중, 고등학생이 다 있었다.

원장은 이걸 맡아 줄 이가 쉽게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체념하고 있던 중에 나를 만나 반가웠는지 300만 원에 시설과 학생을 모두 넘기겠다고 했다.

그녀가 2년간 공들여 만들어 놓은 장소와 모아 놓은 학생 수에 비하면 매우 헐값이었다. 그녀도 국문과 출신답게 셈이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수자가 없어서 학원생이 공중분해 되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나을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도 나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래였다.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구나.’ 생각하며, 카드 빚을 내어 작은 학원을 인수받았다.           



하지만 학원은 수업 시간이 많은 것에 비해 수강료는 저렴한 편이었다. 많은 부분 재정비가 필요했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내겐 벅찬 일과였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출근을 해야 했다.

고등학생 수업은 밤 11시에 끝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엔 아이는 엄마를 기다리느라 눈이 빠진다. 최대한 집에 빨리 오려고 저녁 시간을 없애고 수업했고, 보통 9시쯤 수업을 끝내고 떡볶이나 김밥 같은 분식을 사 들고 들어와 저녁을 때웠다. 아이는 근처에 있는 엄마와 언니가 함께 사는 집(엄밀히 말하면 언니의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아이가 늘 그렇게 표현했다.) 집에 먼저 와 있었다.

아이는 혼자 씻을 줄 알았지만, 내가 집에 들어올 때까지 티브이를 보다가 내가 들어와야만 씻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집에서 샤워를 하기가 무섭다고 한다.

아이도 나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몸은 너무 피곤한데,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새벽녘에야 잠이 들어 아이를 지각하게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춘천은 유독 안개가 많은 동네이다. 아파트 15층에 살고 있었다.

아이가 잠든 밤, 베란다에 앉아서 와인 한 잔으로 피로와 근심과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도 많았다.

안갯속으로 몸을 던지면 안개가 솜이불처럼 나를 받아 줄 것 같았고,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모든 고통은 사라질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든다. 나 그때 내 몸이 부서지는 것보다 아이가 일어났을 때, 엄마가 없다고 불안해하며 우는 장면이 상상되어 더 무서웠다.

그래서 다시 정신과를 찾아가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을 겨우겨우 버티고 나니,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간판 없이도 학생 모집은 수월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평수를 늘려 이사를 해서 학원과 집을 합치기로 했다.

15층에 사는 것이 두려워 2층으로 이사를 했다. 적어도 뛰어내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월세살이가 시작되었다.

내 삶에 있어 자가의 꿈은 잠시였고, 이혼 후 전세살이로 1차 추락, 드라마를 쓰며 날려버린 시간과 돈으로 인해 월세살이로 2차 추락하는 중이다. 하지만 학원도 어차피 월세를 내야 하니까 괜찮은 결정이라며 나를 위로했다.

저녁 시간에 더 이상 아이를 엄마 집에 보내지 않고, 시간을 내어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내가 수업하는 동안, 아이는 거실에서 책을 읽으며 엄마의 수업을 엿들었다.

엄마에게 말을 시키면 안 되지만, 벽 너머에서 바로 엄마 목소리가 들리니 아이는 평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엄마, 이 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    

 

내 수업 내용과 자신이 읽는 책을 접목하며 이런 기특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어이구, 우리 서당개.”     


하며 엉덩이를 두드려 주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니, 찾아오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내 사생활이 뻔히 노출되는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이혼이 뭐 흠인가 하며, 당당히 사실을 털어놓곤 했는데,

나를 찾아오는 학부모들은 삶의 별 다른 고민 없이 자녀 교육에만 집중하는 중산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는 순서는 영어, 수학, 과학, 그다음이 논술이다. 몇 개의 학원을 다니는가 하는 것은 부모의 경제력에 달려 있는 게 현실이다.)

삶의 별다른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학부모들은 사소한 아이들 간의 갈등도 크게 부풀려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 이혼했어요.'라고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집 어딜 봐도 남편의 흔적은 없었으니, 대부분은 나의 처지를 눈치채고 있었겠지만, 가끔씩 눈치 없는 사람이 남편의 안부를 물으면, ‘해외 출장 중'이라는 뻔한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혼자 알 수 없는 열등감에 점점 매몰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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