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장을 보러 가는 길에 그의 문자를 받았다. 문자만 봐도 웃음이 났다.
하이마트 앞을 지나는데, 노랫소리가 들려온다.‘벚꽃엔딩'이었다. 이 노래가 얼마나 경쾌하던가. 길에서 리듬에 맞춰 춤을 출 뻔했다.
그 순간 내가 3년 동안 어떤 음악도 듣지 않았고, 들려오는 음악 소리도 귀에 담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프로야구 두산베어스가 어떤 성적을 내고 있는지도 몰랐고, 당시 정부의 언론탄압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인지에도 관심이 없었다.
때는 가을이었다.
3년 전 봄에 발표되어, 대히트를 했던 ‘벚꽃엔딩’을 이제야 제대로 들어 본다.
그러나 나 이렇게 마냥 즐거워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당시 ‘정오의 데이트' 프로필엔 미혼인지, 돌싱인지를 밝히는 칸이 없었다.
“나 아들 있어요.”
라는 말을 아직 하지 못했다.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카페의 조명에 빛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는 굳이 밝히지 않았어도, 30대 초반 가끔 나를 미혼으로 착각하는 이들에게 나 애 엄마라고 당당히 밝히곤 해왔는데, 서른여덟이나 먹고 이 무슨 주책이란 말인가.
그러나 두 번째 만남에서도 그 좋은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첫 만남의 설렘은 잠시였고, 감정은 점점 슬픔으로 바뀌어갔다.
이제는 정말 말해야 한다.
남자는 나를 잘 나가는 골드 미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실체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싱글맘이란 걸 알고 실망하며 그 먼 길을 돌아가게 할 순 없다.
돌아오는 주말엔 내가 일산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세 번째 만남을 앞두고, 남자는 다소 침울해졌다.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남자의 할 얘기라는 것이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어, 나도 할 얘기 있어요. 만나서 얘기해요.”
남자가 안내한 곳은 테이블마다 반쯤 칸막이가 가려져 있는 조용한 카페였다.
남자는 죄인 같은 표정으로 자신이 이혼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상했어요.”
“그럼, 용서해 주는 거야?”
남자의 얼굴이 밝아진다. 남자는 뺨을 때리면 맞고, 물벼락도 감수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유부남이면 뺨을 맞아 마땅하겠지만, 이혼남이 무슨 죄라고 그렇게까지 저 자세로 나온단 말인가.
“혹시 아이는 없어요?”
“응, 애는 없어.”
남자는 이번엔 당당하게 대답한다. 여기서 당당한 건 또 무어란 말인가.
“난 아이도 있는데. 나도 할 말 있다고 했잖아요. 내가 할 말도 그거였어.”
이제 낭랑 18세는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휴대폰 속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홉 살.”
남자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고 애써 노력했지만, 얼굴색이 노래졌다가 파래졌다가 오락가락했다. 그리고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같은 처지인데 조금도 그런 생각 안 해봤냐고 물었더니, 전혀 생각도 못 했다고 한다.
남자는 다음 날 내게 잘 돌아갔냐고 전화하더니 일주일 동안 연락이 없었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당황한 얼굴을 보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았다.
이젠 차분하게 그의 처분을 기다려야 할 때다. 말은 쉽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토요일 저녁이 되어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서러워져 눈물이 났다.
그는 내가 우는 소리를 듣고 지금 바로 오겠다고 했다. 술을 마셨으니,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울지 말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가 온다고 하니, 난 또 금세 눈물을 닦고 화장을 했다. 두 시간이 좀 지나서 그가 정말 왔다.
남자는 밤 9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술 마시고 버스 타는 거 정말 최악인데, 그것도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이나 달려온 그의 정성이 일주일간의 설움을 녹여주었다.
남자는 미안해하며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랬을 거다.
한 주를 어떻게 보냈는지 얘기하며 회포를 다 풀기도 전에, 11시가 되니 남자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의 아버지가 빨리 귀가하라고 하는 재촉 전화였다.
남자가 이혼 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른아홉 남자의 귀가 시간을 간섭할 만큼 보수적인 아버지가 있다는 건 아직 알지 못했다.
스물다섯부터 독립해서 지금까지 내 생각과 판단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나로선 굉장한 문화적 이질감을 느꼈다. 남자는 아버지의 재촉에 못 이겨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만난 시간보다 오며 가며 길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을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쓰였다.
그가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서도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우리의 만남에 남자에게 나의 아들이 장애물이라면, 나에겐 남자의 아버지가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외아들인 남자는 얼른 결혼해서 2세를 보아야 하는 인생 과제를 안고 있었고, 나는 아들에게 연애만 허락받은 상태다.
모든 게 안 맞았다. 그럼에도 긴 외로움 끝에 한 번 열린 마음은 쉽게 닫을 수도 없었고, 현실의 벽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한 번은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
차라리 아이가 어려서 자기를 친아빠로 여기면 좋겠다고.
당시 재혼 가정 아이들의 성을 바꾸는 게 유행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난 그 부분에서도 생각이 달랐다.
며느리가 딸이 아니듯, 직원이 가족이 아니듯, 아이의 성을 바꾼다고 해서 새아빠가 친아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아빠임을 밝히고 새아빠만큼의 역할만 해 주는 것이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 누구냐 도대체!
남의 아빠가 친아빠인지 새아빠인지 캐고 다니며 뒷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이상한 세상에 눈치 보며 살고 싶진 않다.
그렇게 두 번을 더 만났다가 남자가 도저히 자신이 없다며 헤어지자고 문자를 보내왔다.
"그래. 오래 고민해 줘서 고마워. 그래도 우리 이별은 만나서 하자. 내가 갈게."
나 진심으로 남자를 붙잡을 생각은 없었으며 그의 입장을 이해했다.
외로운 날들 가운데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우리가 만났던 일산의 카페로 가겠다고 했다.
아름답게 작별 인사를 하고,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엄마처럼 풍금 뚜껑을 딱 닫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대답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카페에서 두 시간을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카페를 나왔다.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서 다급한 마음에 길가에 세워둔 차에 불법 주차 과태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서러운 마음으로 과태료 스티커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이별을 바랐으나, 짧았던 만남에 마침표가 없는 이별은 만났던 시간보다 몇 배는 긴 후유증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