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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Sep 27. 2024

결손가정 엄마, 한부모가족 아들

누군가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물어오면, 그냥, 버티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부유하거나 화려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사는 게 즐겁다고 느껴질 때는 ‘희망’이라는 게 있을 때였다. 그러나 지금 내겐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드라마제작사에서 나와 논술 학원을 시작하면서도 글쓰기를 멈추고 싶진 않았다. 소설을 쓰기로 했다. 소설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소설은 혼자서 쓸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시간도 돈도 늘 빠듯했다.



논술 학원은 순조롭게 굴러가는 편이었지만, 월세를 내고, 아이 학원비에 생활비를 쓰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이의 학원비라고 해 봐야 영어, 태권도가 전부였지만, 그것도 벅찼다.

이렇게 돈을 저축해서 내 집 마련을 한다?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예 내 집 마련 같은 건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정작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던 건 통장의 잔고가 쌓이지 않는 것보다 쓰고 있는 소설의 진도가 나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저 나의 바람은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이렇게 버티다가 그 후엔 소박하게 살며 소설을 쓰며 사는 것이었다.      



스물아홉의 나와 서른아홉의 내가 너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세상의 잣대로 보자면 내가 거꾸로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의 잣대란 그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러던 중 추석이 되었다. 언니, 오빠와 모여 아버지 산소에 다녀와서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말 중에 오빠는 언니에게,


“이제 너도 그랜저는 타고 다녀야지.”


라고 하더니 나한테는 대뜸 학생들 몰려들 때 얼른 부지런히 돈을 모아 집을 사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

 ‘아, 저거였지!’ 사람의 마음이나 상황은 조금도 헤아려 주지 않고,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듯 말하는 오빠의 저 잔소리가 지겨워서, 따라다니는 남자가 생겼을 때, 그가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라는 말에 혹해 냉큼 결혼을 선택해 버렸었다. 잠시 아니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래도 학생들이 꾸준히 찾아온다고 하니, 무슨 월 천씩은 버는 줄 아는 모양이다.

소위 업계 월 천 여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궁금했다.

그들의 남편들은 아이를 돌보거나,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한다고 학생들이 얘기해 주어 알았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설거지해 줄 남편을 구하는 것도 웃기는 일 아닌가.

가사 도우미를 부르고 수업을 더 많이 하는 게 더 경제적인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해 봤지만, 월세 사는 주제에 가사 도우미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나도 고민을 안 해 본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집을 사야지 하는 말이 서러워 눈물이 났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의 답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 부모님은 가난했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오빠는 오빠대로 사업을 잘 꾸려가고 있었고, 언니는 죽은 남편의 사망보험금으로 집을 사고도 남았으니, 이제 어느 정도 여유롭게 살고 있는데, 나만 이 지경인 거다.



게다가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오빠의 희생으로 대학까지 나온 언니와 나는 오빠의 말 앞에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이견을 내었다가는 대학 나왔다고 오빠 무시하냐고 언성을 높였기에 (그런 의견 차이는 결코 지성과 무관한 것이었음에도) 그냥 오빠의 말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렸을 땐 우리 집은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가족이란 이름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짐일 뿐이었다.



고등학교 때 작가가 되고 싶다고 오빠에게 말했다가 정말 미친년 취급을 받았고, 그 후로 결혼을 하기 전까지 끝도 없이 짐짝 취급받으며 잔소리를 들었었다.

그런데 이젠 서로 사는 처지도 다르고 고민도 다르다. 이들과 가족이라는 이유로 명절에 모여 앉아 있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 몇 년을 더 그렇게 보내다가 결국엔 명절에 가족과 모이는 곳에 가지 않았다.)

요즘 결손 가정이란 말을 금기시하고 있지만, 나는 결손 가정에서 자란 게 맞다.

결손이 부재의 동의어는 아니다.

누군가는 지금도 부모님 다 있는 결손 가정에서 자라고 있을 것이다. 그 설움은 명절이 지나고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며칠 후, 아이는 평소보다 신이 나서 학교에서 돌아왔다.

사회 시간에 다양한 가족의 형태에 대해서 배우고, 이를 소재로 시를 쓰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아이는 책가방에서 시를 쓴 종이를 꺼내 보여주며,


“내가 제일 잘 썼다고 선생님께 칭찬받았어. 엄마가 봐봐.”


아이는 학교 선생님의 칭찬이 믿기지 않는지, 엄마에게 재차 확인받고 싶어 했다.

시를 읽는다.


'한 부모 가족은 한 부모가

두 부모만큼 사랑을 주는 가족'


시의 구절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엄마가 보기에도 잘 썼어?”


“대단한데.”


아이는 엄마의 인정까지 받은 후에 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렇게 생각해?”


난 내가 감동한 문제의 구절을 가리키며 아이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그럼, 우리가 한부모 가족인데, 내가 그걸 모르겠어?!”


아이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래도 나의 마음을, 나의 노력을 고작 열 살인 아이가 알아주는구나. 아이가 상장을 들고 왔을 때보다 훨씬 더 감동이었다.



그렇게 결손 가정에서 자란 엄마를 위로할 줄 아는 한부모 가족 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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