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찾는 낯선 남자는 자신을 구청 사회복지과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복지과 직원은 아이의 아버지가 지난 10월 사망했는데, 연고자를 찾지 못하여 3주간 대학병원 안치실에 있다는 말을 전한다.
죽었다는 말도 기가 막힌데, 3주나 안치실에 있다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사인이 뭔가요?”
그건 전화로 얘기해 줄 수가 없단다. 사회복지 담당자가 원하는 건 시신 처리를 할 수 있도록 동의서에 사인을 해 주든지 시신을 데려가든지 하라는 거다. 나에겐 이미 남이 된 사람이다. 내겐 그럴 자격이 없다. 단지 아이의 법정 대리인에게 요청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이제 연락을 하신 거죠?”
사회복지과 직원은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기 난감해하더니, 상급자를 바꿔주겠다고 한다. 전화를 받은 남자는 자신을 계장이라고 소개하고는,
가장 먼저 네 살 때 헤어졌다는 친모에게 연락했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외면했고, 다음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연락을 끊고 살았던 두 번째 새엄마에게 연락했지만, 다른 친척들에게 말하라고 하며 외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청에서는 가족 이외의 친척은 확인할 수가 없다고 한다.
다시 그의 첫 번째 새엄마가 낳은 배다른 동생에게 연락했는데, 그는 일련의 상황들을 안타까워하더니 그다음부턴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되자 계장은 무연고자로 처리하라며, 신입 공무원에게 이 사건을 넘겼다고 한다.
계장의 경험상 오래전에 이혼한 전처에게 전남편의 사망 소식을 알려 봤자 좋은 얘기도 듣지 못하거니와, 아이가 너무 어리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여기서 사건을 종결지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경험이 없는 신입 공무원이 어떻게라도 일을 마무리하고자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렇게 3주의 시간이 흘렀다고 계장은 그의 비극에 애도를 담은 점잖은 목소리로 그간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아이 아빠의 시신이 있다는 대학병원에 전화했다. 대학병원 측은 전화로는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으며, 시신을 확인하려면 아이와 함께 와야 하고(나는 이미 남이니까) 시신 양도는 만 13세가 넘어야 가능하며 시신을 양도해 가려면 3주간 안치실 이용료 천만 원을 내야 한다고 한다. 전화받는 이의 차가운 목소리와 천만 원이라는 말이 뒤엉켜 더욱 가슴이 서늘해졌다. 시신 안치실이 호텔 스위트룸과 맞먹는 값이구나. 처음 알았다. 그리고 아이는 지금 열두 살이다. 대학병원이 당장 달려갈 수도 없는 거리이거니와 어떤 일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도 두려웠다. 사고 현장에 119와 경찰이 함께 왔다고 하니 사인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아이가 감기에 걸렸다. 온몸에 열이 나는데도 춥다고 호소하며 품에 안겨 온다.
11월. 감기가 흔한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춥다고 하니, 안치실에 있을 그가 자꾸 떠올랐다.
구청 직원과 상의 끝에 구청에 장례를 위임하기로 했다. 장례를 위임하는 서류를 메일로 받아서 사인을 해서 우편으로 구청에 보냈다. 그리고도 장례 날짜가 잡히는 데 일주일이 더 걸렸다. 구청 직원은 장례 날짜를 안내해 주며, 장례를 위임했어도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안 가면 평생 후회하며 살 수도 있어. 그렇게 마음 불편할 것 같으면 가 봐. 내가 같이 가 줄게.”
장례 전날 친구가 말했다. 하루 종일 고민하다가 다음 날 친구와 수내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친구는 인천에서, 나는 춘천에서 성남으로 가는 길목이다.
출발하는 순간부터 운전하는 내내 그와 함께 살던 10여 년 전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운전을 하려면 눈물은 참아야 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을 아프게 하기에 자살은 큰 죄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모두가 외면했던 그의 죽음을 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장례식장에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화장이 진행 중이었다. 그의 이름이 적힌 번호의 화장장으로 찾아가니 구청 직원이 먼저 와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화장장 앞 나무 의자에 마주 앉았다.
“그래서 어떻게 죽었는데요?”
전화로는 말해 줄 수 없다는 그의 사인을 이제야 물어본다.
그는 오피스텔 옥상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것도 사람들이 거리를 많이 다니는 저녁 6시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하고 많은 방법 중에 왜 그런 끔찍한 방법을 생각했을까. 숨이 끊긴 거야 이미 아는 바고 신체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 시절 내 친구 부부와 함께 원천 유원지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거기서 바이킹을 타다가 무서워하며 끝내는 멈추라고 소리를 지르던 그가 스치듯 지나간다. 그랬던 사람인데 무엇이 그에게 그런 끔찍한 방법을 선택하게 했을까.
구청 직원은 손에 들고 있던 다이어리와 휴대폰을 내게 넘겨준다. 경찰에게 건네받은 그의 물건이라고 한다. 경찰이 화장할 때 같이 태워버리라고 넘겨주었다는데, 구청 직원은 나에게 전해주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다이어리를 펼쳐 보았다. 다이어리 안에는 3년 전 새로 만든 주민등록증과 유서라고 할만한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새로 만든 주민등록증 속에 사진은 나와 함께 살 때보다 더 젊어 보였다. 다이어리 속엔 미용시술을 위한 피부과 진료 예약 같은 메모들도 적혀 있다. ‘나 없이 어떻게 살아갈까.’ 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한때는 잘살고 있었음을 메모가 알려준다. 무탈하게 잘 살던 날들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그의 주민등록번호가 적힌 짤막한 쪽지에는 자신에게는 가족이 아무도 없으니, 그냥 화장해 달라는 경찰에게 남긴 메시지였다.
제 몸 하나 사라지면 그냥 세상 끝나는 것인 줄 알았나 보다. 그래도 소위 명문대를 나온 사람인데, 그만한 세상 이치도 몰랐다니. 그러면서도 일말의 자존심은 남아서 이 세상 이렇게 마감한다는 건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그러나 세상은 무연고자의 유언 따위는 무시한 채, 행정절차를 밟아가고 있는 중이다.
전광판에 화장이 끝났다는 문구가 뜨고, 잠시 후 화장장 직원이 흰 종이 뭉치를 다소 무거운 듯 조심스럽게 들고 와서는 나에게 건넨다. 종이 뭉치를 보곤 깜짝 놀랐다. 도자기 유골함은 바라지도 않았다. 나무 상자도 아닌 종이 뭉치. 그러나 놀라는 것도 잠시였다. 종이 뭉치를 건네려는 화장장 직원의 손을 향해 나는 반사적으로 손이 나갔다.
“뜨거워요. 장갑 끼세요.”
화장장 직원은 종이 뭉치를 들고 있는 손 사이에 있는 목장갑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종이에 쌓인 뼛가루는 뜨겁고 묵직한 것이 혼자 들기에 버거웠다. 친구가 함께 들어주었다. 자갈 만한 뜨거운 알갱이의 느낌이 종이 뭉치 너머로 그대로 느껴졌다.
얼떨떨한 채 화장장 직원이 안내하는 데로 가서 종이 뭉치를 펼쳐 뼛가루를 부었다. 무연고자의 뼛가루가 한데 부어지는 공간이었다. 저 안에 몇 개의 원한이 섞여 있는 것일까. 아니 영혼 같은 건 절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집으로 돌아와 그의 휴대폰을 충전해서 켜 보았다. 휴대폰에 연락처와 문자 메시지, 카카오톡 메신저와 앨범 모두 삭제되어 있었다. 그의 휴대폰은 화면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그 안엔 카카오톡 메신저 몇 개와 몇 장의 사진이 남아 있었다. 그 흔적들로 그가 근래에 아파서 일을 못 했었고 재기를 시도했지만, 누군가에게 크게 배신당했다는 것을 추측할 뿐이었다. 휴대폰 속에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사진이 몇 장 있었다. 아팠다는 게 머리를 다친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었다. 몸은 피곤했는데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