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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메르 Sep 20. 2024

창 밖의 환상과 책 속의 현실

결혼 10주년 기념 호주여행에서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호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행복한 여행이었다. 첫째 나이가 이제 10살이니, 이렇게 다닐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만 돼도, 내가 그랬듯이 친구들을 인생의 최우선으로 생각하면서 부모님과 여행은 꺼려할 것이다. 호주 해변가를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 적당한 시기에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에 가족들과 함께 있는다는 것 자체에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차올랐다. 

 

여행 중 어느 날, 호텔에 앉아 시드니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목요일 오후 5시경이었을 것이다. 우연히 어느 집 옥상을 보게 되었는데, 옥상 한편에 바비큐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고 아빠는 여유롭게 고기를 굽고 세 명의 아이들은 테이블에서 무엇인가를 끄적이기도 하고 그네를 타기도 했다. 서울에서 평일 오후 5시라면 아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광경이다. 직장인들은 퇴근 전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분주할 것이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학원가 어드매서 영어니 수학이니 배우고 있을 것이다. 호주에서 평일 오후 5시가 가족과의 단란함의 시간이라면 서울에서는 여전히 남아있는 과업을 해결하기 위한 분주함의 시간이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는 일이란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도 요원한 일임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표방한 ‘저녁이 있는 삶’이란 한국 사회에서는 현실 속에 존재할 수 없는 무릉도원의 삶 같은 것이었다. 물론 정책 자체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기준들이 필요하다. ‘저녁이 있는 삶’의 원래 의도는 노동 시간의 적정성 혹은 유연한 근무 환경의 필요성을 골자로 한 혁신 안이었다. 이 표어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표어에 공감하고 열광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인가 배는 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고용이 완벽하게 보장되고 일과시간 내에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가능한 일부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장인들에게만 적용 가능한 일이었다. 이 평범한 일을 해내기에는 우리 사회에는 평범하지 못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창 밖을 바라보다 침대에 누운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책을 펼쳤다.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남편의 지인이 준 책인데 처음 읽을 때는 거칠고 극단적인 표현들 때문에 껄끄러워 덮어버렸었다. 여행 동안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인지 책이 눈에 잘 들어왔다. 산전수전을 겪은 저자의 이야기는 지독히도 현실적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일을 할 때는 나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기준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내가 만족하는 수준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사의 눈으로, 동료의 눈으로, 내가 창출하는 생산물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일에 반쯤 미쳐야 한다. 일의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또 일의 아주 가장자리의 디테일을 파악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며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8시간 근무? 5시 이후의 가족과의 단란한 식사? 너무나도 동화 같은 이야기다. 


저자는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 잘 살고 싶은 사람은 이렇게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 부자가 되고 싶고 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정해져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일구고 그로 인해 우리 가족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면 그런 노력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또, 아이들을 양육하고 가정을 꾸리는 사람이라고 그러한 욕망이 없을까. 




 창 밖의 환상과 책 속의 현실. 나는 갑자기 혼란이 왔다.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커리어를 완성하고 잘 살고 싶은 마음, 아이들과 하루하루를 단란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 항상 고뇌했던 이 두 가지가 생각보다 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이 마음으로 와닿았다. 나는 언제나 두 개 다 잘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해 왔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 것이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되새겨 보았다. 호주의 평화로운 가정의 모습이 주는 따뜻함과 책 속에서 마주한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나는 두 세계를 오가고 있었다. 나 역시도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동시에 나의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싶은 욕망도 여전히 강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삶이란 결국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이상, 나는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결국, 완벽한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작은 순간의 행복일지도 모른다. 창 밖의 환상과 책 속의 현실, 그 사이에서 흔들리지만 나는 계속해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결국 내가 선택한 길에서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려는 노력만이 진정한 해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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