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던 때는 앞으로 내 인생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한때, 나도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보겠다는 꿈을 꿨을 때가 있었다. 당시 내 꿈은 기자이자 앵커였다. 그러나 대학교 4학년 꿈은 미완성으로 남고 나는 한 대기업의 인적성검사에서 운 좋게 합격한 후 미친 듯이 면접을 준비해서 아슬아슬하게 합격하였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한동안은 기자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회사 생활을 하며 틈틈이 언론사 공부를 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두 번째 가을을 맞이할 즈음 한 메이저 언론사에 최종면접만 남기고 합격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기자를 처음 꿈꿨을 때는 내 마음속에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다지 불공정을 겪으면서 산 것도 아닌데 난 이상하게도 불공정한 것을 보면 불편했다. 나에게 불공정함을 느끼게 하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민’이라는 감정이었다. ‘연민’과 ‘공정성’. 언뜻 보면 전혀 연관이 없는 요소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인지적으로 공정성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는 감정적인 연민이라는 것이었다. 연민으로 마음이 동할 때마다 이 세상에 있는 불공정한 것들, 내가 이해되지 않는 사회 현상 같은 것들을 바르게 '시정'하고 싶었다. 누구나 A가 정답이란 것을 알면서 도의상, 혹은 불편한 상황을 만들기 싫어서 B라고도 답할 수 있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기자가 돼서 그런 것들을, 기사를 통해 고발하고 바로잡고 싶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회사 생활 끝에 나는 그것이 그냥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회생활에서 많은 것들은 그저 ‘그러려니’하고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려니’ 하지 못하는 것들을 돌려놓기 위해서는 너무 큰 노력과 희생이 필요했다. 그리고 바쁜 회사 생활에서의 피로감과 권태감은 이러한 얕은 수준의 정의감을 상쇄하기에 충분히 무거웠다. 또한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회의가 밀려왔다. 기자가 돼서도 회사의 방향에 따라 글을 써야 한다면 그것이 직장인과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어쩌면 안락했던 대기업 생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비겁함과 그 모순 같은 현실들을 받아들이면서 개선할 만한 의지가 강하지 않았던 나의 의지 부족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난 그렇게 어렵사리 붙은 언론사의 최종 면접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회사 생활은 계속되었고 그러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20대의 꿈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아…. 오늘 같은 하루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겠구나.
결코 나쁜 뜻은 아니다. 단지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하루하루의 루틴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자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아침 일찍 일어나 공부나 운동을 하고 일터로 가서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안온하게 잠자리에 들 것이다, 내가 큰 실패를 하지 않는 한 이러한 삶을 계속 살 것 같았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좋을 것도 없는 삶,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 것이 내 앞에 놓인 현실이었다.
2, 30대에 무엇인가를 갈망하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고 더 멋진 나를 원했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나는 ‘미래, 갈망, 목표’가 있던 자리에 대신 ‘의미와 목적’을 두기로 했다. 내가 꿈꾸는 그 신기루와 같은 삶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라면 지금 내가 하는 일과 행동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의미와 목적을 되새길수록 마음은 조금씩 충족되어 갔다. 미래의 나를 꿈꾸면서 노력을 할 때에는 도저히 충족되지 않았던 어떤 불만족감 같은 것이 항상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의미와 목적을 생각하니 묘한 충족감이 들었다. 그래, 나 잘하고 있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동료들의 세미나를 매주 듣는다. 다들 일괄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박사 논문이 계속 진행될수록 “나는 왜 이 논문을 왜 쓰는 거지?”라는 자괴감이 드는 질문에 끊임없이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 논문을 왜 쓰는지, 내 연구의 연구질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이 연구 질문만 확실하다면 중간에 모형이나 변수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했다. 연구처럼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 인생에 대해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만 정확히 갖고 있다면 인생에 흔들림이 없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면서 반성하고 성찰하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나는 앞으로도 더 이상 무엇인가를 이루어야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일상 속에서 의미와 목적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잃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꿈이 더 단단한 형태로 나의 삶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꿈은 더 이상 어떤 신기루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항상 작동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내일은 달라질 거야!”라는 기대 속에 살지 않는다. 오늘 하루의 선택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내게 어떤 목적을 부여하는지를 성찰하면서 살려고 노력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변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작은 성찰과 성장의 순간을 발견하는 과정임을.. 그리고 그 작은 변화들이 쌓여 결국 내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