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도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뽀얀 아기의 얼굴, 선은 그 아기의 얼굴을 보면서 사랑을 배웠다.
아이에 대한 사랑을 통해 다른 생명의 소중함도 함께 깨닫게 된 것이다.
선은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고 스스로 자평했다.
타인의 아픔에 그렇게 민감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아이를 낳고 타인의 아픔이 아이의 아픔, 그리고 나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세상에―타인에게―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을―타인을―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를 통해 세상과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 것이다.
육아 기간은 선이 아이를 키운 것이 아니라, 아이가 선을 키운 것이었다.
축복이었다.
선은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시간보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언제나 아이의 반응이었다.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아이의 반응은 진리 그대로였다.
선이 지향하는 세계가 그 조그만 우주 속에 있었다.
아이는 이미 모든 지혜(선)를 체득한 채, 완전체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선은 아이의 (그) 선한 본성 그대로 세상에 뿌리를 내리게 하고 싶었다.
왜곡되지 않은 본성 그대로 세상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본성을 훼손시키지 않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건강한 영혼의 집을 짓게 하는 것, 그게 우주의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처럼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심어 주는 것이 어디 있을까?
엄마의 사랑은 세상에 대한 아이의 물음에 가장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피드백인 것이다.
선은 그 힘을 받은 아이가 세상에 건강하게 뿌리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은 나무를 아비투스―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가 아름다운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사회성 때문에 학교에 보낸다고?”
홈스쿨링을 고민할 때, 부부교사인 언니 부부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거 별 거 아냐! 학교에 오면 사회성이 더 나빠져! 요즘 애들은 친구한테 노트도 안 빌려 줘! 경쟁이 얼마나 심한데! 그리고 착한 애들은 밟혀! 그건 선생님들도 어떻게 못해! 얼마나 무서운 데! 이런 애들은 선생님도 감당 못 한다니까! 내가 우리 반에, 아주 못되게 구는 애가 있어서 혼을 냈더니, 걔가 학교 여기저기다 뭐라고 써 붙여 놓은 줄 알아? ‘선혜경! 내가 니 아들, 가만 안 둘 거야! 6학년 2반, 권준희! 니 아들! 내가 죽여 버릴 거야! 꼭 죽여 버릴 거야!’ 그렇게 여기저기다 써 붙여 놨어!”
언니는 조카가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떠났다.
학교는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위험한 사회였다.
폭력은 야만적이고 비열한 집단의 언어라고,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폭력을 쓰지 않는 아이는 학교에서 폭력적인 아이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이다.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폭력이 통하는 사회에서의 사회성이란 뭘 의미하는 것일까?
그걸 건강한 사회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그렇게 집착하는 사회성이란, 구조물에 쓰이는 벽돌로써의 역할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어떤 구조물이냐는 것도 상관없이!
그러나 벽돌처럼 재단된 것이 아닌,
나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로 조화를 이루고 사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행복한 것이 아닐까.
자연이 훼손된 인공미보다 사람의 손이 덜 간 곳의 조화가 더 아름다운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구조물의 쓰임은 수 십 년을 넘지 못하지만 나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가치는 영원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대중교육의 한계가 가지고 있는 맹점을 지적하면 사회성이라는 말로 입막음을 한다.
그러나 문화와 문화의 차이.
갭이 너무 컸다.
공격성―심리학과 사회행동과학분야에서 같은 종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수치심을 느끼게 하거나 고통을 주거나 혹은 상해를 입히는 행동을 말한다―이 없는 아이는 학교에서 오히려 만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바른 부모라면 어떻게 내 아이에게 공격성(폭력)을 가르치겠는가?
소심한 부모들은 폭력적인 아이의 관심이 부디, 내 아이만 피해 가기를(내 아이만 피해 가면 다른 아이에게로 가는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내 아이가 그런 아이의 관심에서 벗어나기만을 애면글면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어른들의 사회가 안전했다.
어른들의 사회는 법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는데, 학교는 법도 제도도 미미한 안전망이 없는 사회인 것이다.
학교야말로 적극적인 개혁이 필요한데 교육자들이나 정치가들은 자리에만 연연할 뿐 누구도 손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직무유기의 사회.
선은 학교(신화)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우리가 정답이라고 우겼던 정답은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드러난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선은 지우개로 과거의 정답을 지웠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이들이 타고난 선한 본성 그대로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자기의 고유성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