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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Mar 11. 2023

8. 외우는 공부가 아니고 느끼고 경험하는 공부

선과 나무의 홈스쿨링


아이들이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는 이유는 교실에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사고와 인식이 무시되는 수업 방식에 있지 않을까.

어떻게 이런 교육이 수 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었을까?

개인의 자연스러운 인식의 흐름을 차단하고 방해하는 수업, 사고의 과정은 무시되고 정답만 찾는 공부.     

선은 학교 다닐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필기 내용이나 참고서의 내용만 정답으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내 의견을 말하는 것은 수업의 흐름을 방해하는 눈치 없는 짓이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내 사고의 기능은 정지시켜 놓고 참고서나 노트 필기를 기계처럼 외워야 하는 시간, 선은 그 시간이 괴로웠다.

그 시간을 잘 버틸수록 높은 점수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선은 왠지, 그 시간을 길게 버티는 친구들을 보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감각되는 어떤 진실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나의 이익만 챙기는 것에 특화된 인격처럼 보였다.


선이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 짝은 반 배치고사에서 전교 5등―중간고사에서는 전교 1등이었다―으로 들어온 친구였다.

그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이 칠판에 써준 필기 내용을 쉴 새 없이 반복해서 큰 소리로 외워댔는데―옆 사람에 대한 미안함도 없었다―계속 같은 소리만 달달달 외우고 있는 친구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 친구는 타인과의 정서적 교감이나, 사유의 시간은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선이 학교를 그만둘 때까지 짝이었던 그 친구와 나눈 대화는 고작 몇 마디, 그것도 시험에 관한 내용이 전부였다.     

                                           



홈스쿨링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수업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선은 나무에게 정서적으로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부의 시작은 열심히 노력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부터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사고와 인식을 통해 지적인 자유를 획득하게 하는 것.


홈스쿨링의 첫 번 째 시도는 모든 사슬을 풀어 활짝 개방하는 것이었다.

세상처럼 완벽한 교과서가 어디 있겠는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끼고 인식하는 게 첫 번째 과정이었다.

따로 교과서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교과서는 왜곡된 정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도덕을 교과서로 배우고 시험을 보는 것은 난센스였다.

그래서 교과서는 책꽂이에 꽂아두고 동화책처럼 언제든지 보고 싶을 때, 꺼내 읽도록 하였다.


(선은 어릴 때부터 교과서가 불편했다. 내 생각과 상상력은 접어두고, 그 속에 나의 정서와 사고를 강제로 끼워 맞춰야 하는 과정은 사고의 확장이 아니라 사고를 수축시켜 세계와 연결된 자연스러운 내 사고의 흐름을 끊어내고, 타인의 틀 속에 나를 맞추고 고정시켜 버리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 선은 나의 느낌이나 나의 고유한 사고는 잠시 멀리 하고, 그 시간을 남들처럼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란 원래 재미없는 거라고 이해했다. 그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내가 나를 열심히 고문하는 행위와 같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권위―선생님이나 참고서―에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인식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사고의 과정을 교육의 큰 물줄기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누구의 견해나 설정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머리가 느끼고,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나의 언어로 구체화하는 과정 속에 뇌의 시냅스가 활발하게 연결되어 추상적 사고에 눈을 뜨고, 어떤 서사의 거시적인 인과관계까지 유추해 보는 것이 홈스쿨링이 가진 목표였다.


1등은 하지 않아도 되고 정답을 맞힐 필요도 없었다.

선은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의 풍경을 다양한 거리와 각도에서 자유롭게 탐구하고 연구하는 게 진짜 공부라고 생각했다.     

                                           



선은 교육도 좀 더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의 이모가 생각났다.

출판사에 다녔던 이모는 선의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선과 같이 잠을 잤는데 선은 이불을 깔고 이모와 나란히 누울 때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때 이모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서 아직도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기억에 남아있다.

고작 초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밖에 안 된 조카에게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니.

그러나 그 순간의 서늘했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를 떠올렸던 기억까지.

그리고 멍한 눈길로 천장을 바라보면서 주인공이 자살했다는 장면을 이야기하는 이모의 허무에 젖은 목소리까지 말이다.  

선은 그것을 선험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아이들’을 본 나무는 이내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엄마! 저 나라 사람들은 왜 어린이들을 저렇게 힘들게 해?”     


“아직 어린이들의 인권이 없는 나라라서 그래. 엄마가 어릴 때, 우리나라도 그랬어!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야!”     


“그럼, 옛날에 우리나라도 그랬는데 지금은 달라진 거야?”     


“응,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이 진화한 거야.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 ‘이건, 뭔가 공평하지 않은데! 어린이들한테 너무 불공평해!’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행동을 바꾸고, 다른 사람한테도 그 생각을 전염시킨 거야. 그게 생각의 바이러스야. 생각의 바이러스! 바이러스 알지?”     


“응, 나쁜 병원균을 옮기는 거!”     


“나쁜 병원균을 옮기는 바이러스도 있지만 이건 좋은 생각을 전염시키는 생각의 바이러스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전염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바이러스지! 사랑의 힘이 타인에 대한 내 생각을 조금씩 바꾸게 하는 거야! 진실을 알고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거든! 사랑으로 타자에 대한 내 생각을 조금씩 바꾸어가는 거, 엄마는 그걸 진화라고 생각해. 생각의 진화는 측은지심 같은 사랑의 촉매작용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아! 나아갈 진! 될 화! 알지?”     


“알고 있어! 나아갈 진! 될 화!”     


“그리고 생각이 진화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진보라고 말해. 나아갈 진! 걸음 보!”     


“나아갈 진, 걸음 보!”     


“세상이 한 걸음씩 나아진다는 거! 조금씩 세상이 달라지는 거! 그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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