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랑비탈 Mar 18. 2023

9. 영화는 교육의 도구(이미지로부터 발현되는 사고들)

선과 나무의 홈스쿨링

         

공부를 놀이처럼 즐겁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파티처럼 말이다.

그것은 선의 연구 과제였다.

선은 어릴 때 보았던 영화들을 떠올렸다.


주말의 명화나 명화 극장 시간이 되면 선의 아버지는 바쁘게 움직였다.

긴 광고가 나오는 시간을 이용해, 양푼에 찬밥을 넣고 저녁에 먹다 남은 나물을 고추장에 석석 비벼 비빔밥을 만들거나, 삶은 국수에 김치를 쫑쫑 썰어 넣고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린 다음 비빔국수를 해서 두 딸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먹었다.

선은 아버지가 해주는 야식을 먹을 때마다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요리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영화를 보면서 먹는 야식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어느 날, 명화극장 예고에서 영화 평론가 정영일 선생이 루루의 “To sir with love”를 들려주면서 “언제나 마음은 태양”을 소개했다.

영화광이었던 아버지는 선에게 아빠가 감명 깊게 봤던 영화라고 하면서 오늘은 끝까지 보고 자야 된다고 말했다.

언니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끝까지 영화를 보고 잤지만 선은 종종 야식만 먹고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날 선이 본 시드니 포이티어의 인상은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선입견과는 달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지독하게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저런 모습도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선은 사람들을 볼 때, 좀 더 세심한 눈으로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마다 미세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 차이가 그 사람의 품격을 결정한다는 것도, 그 미세한 차이는 각자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도 말이다.


그때부터 선은 사람들을 골똘히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종종 약장수들이 원숭이를 데리고 와서 약을 파는 장소였다.

햇살이 가득한 뜨거운 공터에서 손차양을 만들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누군가 여자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여자는 방금 전과의 모습과는 다른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그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슬픔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어른이 되면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저 모습이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어른의 모습인가?

앞으로 다가올 삶이 무겁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내면에 감춰진 ‘슬픔의 발견’ 때문일까?

그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특별해 보이기 시작했다.

슬픔을 가진 사람들이 신비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정이 느껴졌다.       

       



선에게는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그림이 있다.

크리스마스이브만 되면 선의 아버지는 두 딸들을 시장에 데리고 나가, 통닭과 사과, 배, 귤―70년대의 귤 맛은 얼마나 달콤한 신세계였는가―같은 먹을 것을 잔뜩 사주었다.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모임에 가족을 집에 두고, 혼자 가는 것이 미안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오전, 선과 선의 언니는 전날, 먹다 남은 과자와 아이스크림, 과일 등을 먹으면서 TV 앞에서 작은 아씨들을 보았다.     

선은 행복했다.

창 밖에 눈이 쌓인 예쁜 풍경과 보일러가 돌아가는 따뜻한 실내, 그리고 쟁반 위에 잔뜩 쌓여있는 간식들. 거기에 TV에서 방영하는 작은 아씨들…….

이 완벽한 조합은 선이 어른이 되어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공간이 되었다.     


선은 작은 아씨들이 보여주는 세계가 부러웠다.

그들의 꿈과 도전과 연애와 낭만이 부러웠고, 충분히 존중받고 그 시간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소녀들의 발랄함이 부러웠다.

밝은 표정에서 빛나는 소녀들의 자존감은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선에게 삶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선과 선의 언니도 같은 또래였지만 내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내 삶의 주인공이 아닌, 어른들의 공간에서 어른들의 부속품처럼 살고 있었다.

그때까지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종속적인 삶이었다는 의식도 없었던 것이다.     


영화의 미덕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하는 것,

그리고 조용히 흔들어 놓는 것.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좋은 교육의 도구였다.

선은 이십 대에 소극장에서 보았던 찰리 채플린의 영화들을 나무에게 보여 주었다.

모던 타임스, 위대한 독재자, 키드 등……


그즈음 나무는 이원복 교수가 쓴 ‘먼 나라 이웃 나라’를 통해서 산업혁명이나 나치즘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나무는 여덟 살 때부터 이원복 교수의 ‘먼 나라 이웃 나라를 읽기 시작했는데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선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가 풍자하는 것들, 이를테면 산업화 시대의 인간 소외 현상이나 파시즘과 인종주의에 대해 나무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무는 찰리 채플린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에서 '팡팡' 웃기도 했지만 가끔 진지하고 슬픈 표정을 짓기도 했다.

특히, ‘키드’를 좋아했는데 좌충우돌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온몸이 데워지는 따뜻한 풍경이 좋았던 것 같았다.     


나무와 함께 봤던 영화들 중에서 칼 세이건 원작, 조디 포스터 주연의 콘택트도 잊지 못할 영화였다.

조디포스터가 훌륭하게 연기했던 이 영화는 따뜻했고 철학적이었고 과학적이었다.

선과 나무는 어떤 느낌에 이끌려 세 번을 반복해서 봤는데―그 느낌을 문신처럼 영혼에 새기고 싶었다―그때마다 새로운 깊이의 울림을 더해 주었다.

내가 믿는 것, 내가 믿는 것을 지키고 바라보는 인간의 비범한 시선…… 그런 시선은 결국 보이지 않는 어떤 세계와 맞닿아 있다는 스토리가, 볼 때마다 감동을 주었다.


이런 시간들은 선에게 나무를 키우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기쁨을 주었다.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닌, 아이의 성장과 함께 변화하는 존재로 영혼의 텔로미어가 길어지는 것 같았다.         


홈스쿨링 기간 동안 나무와 선이 본 영화는 수없이 많았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죽은 시인의 사회, 일포스티노, 책상 서랍 속의 동화, 미술관 옆 동물원, 집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 레인맨, 포레스트 검프…… 매트릭스, 스타워즈, 쉰들러 리스트, 마지막 황제, 반지의 제왕,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등등.


이런 영화들은 역사를 담고 있거나 과학적 가설을 담고 있거나 인간의 아름다운 정서와 기발한 상상력과 철학을 담고 있어서 모두 나무에게 좋은 배움의 교재가 되었다.     


선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을 접목시켜 수업을 진행할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웰메이드 드라마로 소문난 BBC의 6부작, ‘오만과 편견’을 보고 나무와 함께 소설을 읽은 다음, 다시 영화를 보고, 또 제인 오스틴의 또 다른 작품 센스 앤 센서빌러티도 영화와 소설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인 오스틴의 작품 세계에 대해 얘기하면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소설가들―샬롯 브론테나 에밀 브론테―의 작품들(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도 찾아보면서 그 시대의 특징이나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유롭게 말하는 방식이었다.


작품 속의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삶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에 대한 시선이 깊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은 나무에게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볼 때마다 내 생각, 내 느낌을 갖는 것이 중요한 선이라고 말했다.

내 느낌을 가지고 사유하는 것은 삶을 정직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내 느낌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미 프린트된 정답만 보고 사는 사람은 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복사하며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 삶이 없는 삶 속에 자존감이 있을 리 없다고. 그것은 삶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모호하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 그걸 내 언어로 찾아내고 표현하는 사유의 과정이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 짓게 하는 첫걸음이고 보이는 세계―현실, 또는 타자의 세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이상세계―나만의 유토피아―와의 접촉이라고.     


선은, 느낌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진실이고, 느낌에서 출발한 사유는 인생에서 가장 믿을만한 생존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창의력이나 상상력이란 이렇게 타자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라고 나무에게 말했다.     

선은 나무의 사고력이 사유를 통해 창의력이나 상상력의 세계까지 도달하길 기대했다.


내 생각, 내 느낌은 창조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첫 시도이고, 내 삶을 예술의 세계, 순수의 세계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기초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전 09화 8. 외우는 공부가 아니고 느끼고 경험하는 공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