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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Mar 25. 2023

10. 수학공부와 올림피아드 문제(애착과 신뢰)

선과 나무의 홈스쿨링

        

선과 나무의 일상은 평화롭고 평범했다.

평화로운 일상은 생각의 깊이와 연결되어 있다고 선은 생각했다(세상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너그러운 시간들……

너그러운 시간은 사고의 확장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거리낌 없이 시간의 좌판 위에 생각들을 펼쳐 놓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간들 말이다.     

                                          



나무는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한 다음, 클래식을 들으며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신문을 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11시부터 수학 문제를 풀었다.

교과서의 무용론에도 불구하고 수학 교과서는 (유일하게) 홈스쿨링의 주요 교재가 되었다.

나무는 나이에 맞는 수학 교과서의 한 학기 내용을 2~3주 동안 집중해서 풀고, 문제집을 사서 개념, 실력, 심화 순서대로 풀어 나갔다.


(홈스쿨링을 시작한 처음 1,2년 동안, 나무가 푼 문제는 선이 직접 채점했다. 선이 직접 채점하는 이유는 나무가 실수로 틀렸는지, 아니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틀렸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80점 이상이면 무조건 pass였다. 교육과정은 나선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백점을 맞는 것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 못 풀면 언젠가는 풀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홈스쿨링의 장점은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은 나무에게 수학을 지도한 적이 없었다.  

어릴 때, 과자나 초콜릿 따위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덧셈 뺄셈 놀이를 한 것과 나무가 나눗셈을 처음 시작할 때, 아주 사소한 도움을 준 것 밖에.     

나무야! 지금 과자가 몇 개 있어?


엄마랑 한 번 세어볼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과자가 일곱 개가 있네!     

나무가 한 개 먹을까?     

맛있어? 다 먹었어?     

이제, 몇 개가 남았을까?     

우리 같이 세어 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선은 옆에 있는 아무 종이에 수식을 쓰고, 일곱 개 중에서 나무가 한 개 먹었으니까 여섯 개 남았네, 하고 설명했다.     


선이 나무에게 덧셈, 뺄셈 놀이나 칠교놀이 같은 것을 하자고 제안할 때마다, 나무는 또 어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까? 하는 눈빛으로 선을 바라보곤 했다.

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언제나 신뢰로 가득했다.


    



나무가 두 돌 때쯤 되었을 때, 선이 나무와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선에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복통―담석동통이었다―이 찾아왔다.

선은 같은 비행기에 탔던 승무원을 발견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승무원은 난감한 듯(아니, 귀찮은 듯) 복통 때문에 허리를 구부리고 아기를 띠로 가까스로 안고 있는 선에게 “저쪽 사무실로 가보세요”라고―이제 내 업무는 끝났다는 듯이―말했다.

승무원이 손으로 가리킨 사무실은 선에게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도망치듯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고 있었다.      

나무를 안은 선은 짐을 들고 식은땀을 흘리며 승무원이 가리킨 사무실에 찾아갔다. 선의 목소리는 신음에 가까웠다.


“제가 지금 복통이 심해서 그러는데, 저희 남편에게 연락 좀 부탁드릴게요.”


책상에 있던 남자는 선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도 하고 삐삐도 쳤지만 남편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남자는 선에게 우는 아이를 받아 안고 달래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빨리 병원에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안정을 취하면 좀 괜찮아졌어요. 집에 가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죄송한데 택시 좀 잡아주실래요?”


남자는 택시의 앞자리에서 오직 엄마만을 바라보며 엄마한테 가겠다고 떼를 쓰고 울고 있는 아기를 달래고 있었고(정말 고마운 천사였다), 선은 아픈 배를 움켜쥐며 우는 아이를 쳐다보며 “나무야! 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기다리면 집에 갈 거야.” 하고 계속 달래고 있었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 때 복통이 멈췄다.

그제야 선은 오직 엄마만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나무를 안아줄 수 있었다.

선이 나무를 안자, 나무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울음을 ‘뚝’ 그쳤다.


아이에게 엄마란 얼마나 간절한 존재인가?

선은 아이가 주는 그 뜨거운 사명을 배반할 수 없었다.

그걸 조그만 심장을 가진 아이가 알아차렸을까?

나무는 선이 하는 말은 무조건 따르고 신뢰했다.


선은 두려웠다. ‘내가 혹시 나무를 잘 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선은 나무에게 말을 하기 전에는 언제나 기도부터 했다.

내가 하는 말이 과연 나무에게 옳은 것인지, 아니면 엄마인 나를 위한 것인지? 그러면 어느 순간, 기다렸던 편지가 온 것처럼 선명하게 답이 보였다.     

                                          



선은 나무가 태어났을 때부터 완벽한 소통의 즐거움에 빠졌다.

나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생명이었지만 완벽한 인격체였다.     

나무가 태어난 날은 12월 8일이었는데 12월 24일 밤, 선은 버튼을 누르면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오는 멜로디 카드에 깨알 같은 글씨를 써서 나무의 머리맡에 놓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아침, 카드에 쓴 글을 나무에게 읽어 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나무야! 잘 잤어?

오늘은 나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야!

예수님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신 날이지!

사람들은 이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카드나 선물을 주고받아!

그래서 엄마 아빠도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무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준비했어!

엄마 아빠는 나무가 엄마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줘서 너무 고마워!

나무는 엄마 아빠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감동이고, 기쁨이고, 행복이야!

엄마 아빠가, 엄마 아빠가 된 것은 처음이라 어쩌면 나무를 키우면서 실수를 할 수도 있어!

혹시 엄마 아빠가 실수를 하더라도 우리 엄마 아빠가 처음이라서 그렇지, 하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길 바래!

엄마 아빠도 나무의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걸 잊지 말아 줘!     

그리고 엄마 아빠는 나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나무 편이라는 것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나무! 사랑해!      

                                             

                                                                                          사랑하는 나무에게, 엄마 아빠가!     



선은 멜로디 카드의 버튼을 눌렀다.

멜로디 카드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다.

Dashing through the snow……

나무도 아는 듯, 모르는 듯, 캐럴을 들으면서 엄마를 보고 방실 방실 웃고 있었다.     

     



선의 아버지는 종종 가족회의를 한다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불렀다.

예를 들면, 새집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은지, 아닌지를 묻고 진지하게 두 딸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까?

선은 나무와 관련된 일을 결정할 때는 언제나 나무와 먼저 의논을 한 다음, 결정했다.

나무는 두 돌이 지날 무렵까지 모유를 먹었다.

모유를 뗄 시기가 되었을 때, 선은 나무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보았다.


“나무야! 우리 이제 모유는 그만 먹을까?”


나무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질문이었다는 듯이 빙긋이 웃더니, 능청스럽게 계속 모유를 먹고 있었다.

다음 날, 선이 나무에게 수유하면서 다시 말했다.


“나무야! 사람들이 놀리는 거 알지! 다 컸는데 아직까지 모유 먹는다고! 우리 이제 그만 먹자! 나무도 체면이 있잖아!”


나무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씩 웃더니, 그다음부터는 정말 모유를 먹지 않았다.

기저귀도 나무와 그렇게 충분히 의논을 하고 합의를 거친 다음 뗐다.     

                                           



선이 장사를 할 때였다. 어린이 집에서 전화가 왔다.     


“나무는 누가 공부를 가르쳐 줘요?”     


“아니요! 아직은 재미로 공부할 때라 봐줄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러게요. 저도 어머니가 바쁘셔서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무는 수학을 안 가르쳐줘도 혼자서 잘 풀어서요. 다른 아이들은 한 페이지 풀고 물어보고, 한 페이지 풀고 물어보는데 나무는 자기가 보기 보고 알아서 잘 풀어서 신기해서 전화드렸어요.”     


선은 아마 독서 능력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일찍 한글을 떼고 어릴 때부터 책 읽기가 생활화가 된 나무는 어휘력도 풍부했고 이해력도 빨랐다.

책을 읽고 습득한 단어의 수만큼, 나무의 머릿속에 벌집처럼 많은 사고의 집이 지어져 있지 않았을까.     

                                           



어느 날, 서점에 갔을 때 학년 별로 진열되어 있는 올림피아드 문제집이 눈에 띄었다.

선이 문제집을 집어 몇 장 넘겨보는데 어려운 문제들이 즐비했지만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두뇌 계발에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야! 이거 한 번 풀어볼까?”     

“어디!”      

나무는 진지하게 훑어보더니 대답했다.     

“……좋아!”     


그러나 올림피아드 문제는 지금까지 나무가 풀어왔던 문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무는 한 문제를 가지고 몇 시간씩, 또는 다음 날까지, 씨름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렵나? 잘 푸는 아이들도 있다는데……’     

그때, 선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나무에게는 나무만의 학습속도가 있는 거니까.’      

선은 아이들마다 고유의 학습 속도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기준을 오직 나무에게만 두고, 하루하루 조금씩 나무의 실력이 향상되는 것만을 기뻐하자고 생각했다.     


선은 문제를 푸는 나무에게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주기 위해, 옆에서 같이 문제를 푸는 시늉을 했는데―대부분 선이 풀 수 없는 문제였고, 결국 답을 내는 것은 언제나 나무였다―나무는 한두 시간 만에 푸는 것도 있었지만, 네다섯 시간씩 문제를 붙들고 있는 것도 허다했다.

그렇게 해서 풀지 못하는 문제는 그냥 대범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언젠가는 풀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세 문제씩 푸는 것으로 정했는데 풀이가 가능한 것은 언제나 한두 문제뿐이었다.

그래도 선은 좋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우선 나무가 문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풀어보는 자세가 기특했고, 문제를 푸느라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과정이 두뇌 발달에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문제집을 끝내고,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다시 접근했을 때, 나무는 그동안 풀지 못했던 것들을 정말 아주 쉽게 풀었다(물론 두 번째 시도에도 못 푸는 문제들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것은 고작 두세 문제뿐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한 권을 다 풀고 난 나무는 하루에 세 문제 씩 풀던 올림피아드 문제를 다섯 문제로 늘여 갔다.

이제는 두세 문제 정도는 수월하게 풀고 있었다.

두뇌계발을 목표로 시작한 올림피아드 문제는 대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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