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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Aug 16. 2023

2. 내 머릿속에 들어온 호모 사피엔스

<소설> 애니메이션 회사

     

어느 날, 출근카드를 찍고 작업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권도현이 사무실 쪽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경쾌한 손놀림으로 내가 꽂아놓은 출근카드를 뽑아보고 있었다.


내 이름이 궁금했던가?

나는 ‘왜?’ 하고 묻는 대신 이미 내 카드를 손에 들고 있는 그에게 “37번”이라고 카드 번호를 큰 소리로 불러주었다.

아무튼 그때, 나는 생기발랄한 스물두 살의 아가씨였으니까.

권도현과 나, 그리고 빈 공간만이 침묵을 지키며 은밀하게 소곤거리는 실내에서 금기를 깨고 나온 내 목소리가 허공에 ‘쨍’하고 부서지면서 권도현의 얼굴에 달라붙은 것처럼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후, 나는 권도현이 작업실의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 때, 바르던 립글로스를 계속 발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여자를 아는 남자의 편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권도현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 특유의 오만함과 영민한 시선, 그리고 느긋한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은정에게 물었다.

이 바쁜 세상에 무료한 듯, 시니컬한 표정으로 어슬렁거리면서, 이방인처럼 왔다 갔다 하는 이가 누구냐고?

사장님 아들인데 집에도 안 들어가고 매일 회사에서 잔다고. 그래서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권도현도 나에 대해 궁금했던가?

어느 날 아침, 선화부와 칼라부의 총치프인 채경언니가 나를 불렀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영국제 커피 잔에 커피를 담아 예쁜 쟁반 위에 올려놓고.

언니는 쟁반을 들고 앞장서면서 커피포트를 들고 따라오라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뜨거운 물이 담긴 커피포트를 들고 실크블라우스에 세무스커트 차림으로 쟁반을 들고 가는 채경언니의 뒤를 따라갔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굵은 웨이브 펌을 한 채경언니의 뒤태는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웠다.


권도현이 있는 사무실이었다.

그 방에는 권도현 외에 경리 과장과 총무 과장도 함께 있었는데, 채경언니의 태도에서 (한 여름의 짙은 풀냄새처럼) 여성성이 물씬 풍겼다.

나는 권도현과 사무실 사람들 앞에서 발산되는 채경언니의 여성성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채경언니는 빼어난 외모를 사회생활에 이용하고 있었고, 어리석게 그런 편법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또, 이게 뭐람?

내가 지금 무슨 알현이라도 하는 것일까?

나는 채경언니에게 불쾌감과 함께 엷은 연민을 느꼈다.

채경언니의 낮은 자존감만 아니었다면 내가 커피포트를 들고 권도현 앞에 가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채경언니는 커피 잔에 물을 따라주면서 권도현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채경언니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나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의 책상 위에 커피 잔을 내려놓는 손은 내게 쏠린 그의 시선 때문에 조금 떨렸을 것이다.


떨리는 손을 바라보는 그에게 흔들림이 느껴졌다.

거만함이 몸에 베인 그는 갑각류처럼 쉽게 흔들리는 부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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