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을 위해 다닌 학원에서 영화 “자이언트”의 록허드슨을 닮은 강사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던 것이다(그도 록허드슨처럼 완벽한 슈트핏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의 강의를 듣고 있는 여학생들은 모두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눈동자가 그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외모, 실력, 매너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었다.
자격증을 따고 몇 개월쯤 지났을 때, 스물한 살이라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게 늘어지는 걸,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그에게 ‘보고 싶어요, 선생님!’이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내가 일방적으로 약속한 장소에 완벽한 슈트핏을 자랑하며 나타났다.
꿈속의 사랑이 드디어 현실로 리플레이되고 있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일요일 오전부터 저녁 늦게까지 자리를 옮겨가며 긴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주로 그가 어린 시절의 이야기나 가족, 또는 군대 이야기를 하면 INFJ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9시간 동안 이어진 긴 이야기, 나는 그것으로 그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만큼 그의 서사를 알고 있는 여자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제 나에게도 근사한 사랑이 시작되는 거 같았다.
스물한 살의 여자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함께 밥을 먹고 데이트를 하며 달콤한 키스를 꿈꾸는.
그런데 그의 행동이 좀 이상했다.
전화를 하면 기다렸던 사람처럼, 매일 만나온 사람처럼 언제나 그렇게 다정하고 순종적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그가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고시 준비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첫 만남 이후 오랜 시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견우와 직녀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기본급이 있는 프리랜서였는데) 새 작품이 들어가기 전에는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했다.
오전 근무라고 해야 각자 취향에 맞는 잡지책을 읽거나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자유 시간이었다.
작업을 할 때는 일하기 편한 차림으로 출근하던 제작팀의 여자들은 이때 허물은 벗은 나비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출근한 후, 점심시간쯤, 퇴근카드를 찍고 명동이나 논현동에서 쇼핑을 즐기다 저녁이 되면 남자 친구를 만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단짝인 은정과 나는 강남역 지하상가에 있는 커피숍 샹그릴라에서 수다를 떨거나 그 근처에 있는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우리들의 시간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날도 일찍 퇴근하는 날이었다.
완벽하게 단장한 여자들은 제각각 아름다움을 뽐내며, 행복에 들뜬 얼굴로 작업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로비는 사랑에 빠진 여자들의 의기양양한 미소와 화사한 빛깔의 립스틱과 옷차림으로 출렁거렸다.
은정과 나는 강남역으로 갔다.
우리는 청춘의 화려한 군무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지하상가에 있는 분식점에서 떡볶이와 맛탕으로 배를 채우고 샹그릴라에서 수다를 떨다가 서점으로 갔다.
그리고 으레 사회과학 코너로 가서 에리히 프롬의 신간을 찾아보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건전한 사회, 인간의 마음 등 모두 읽은 것뿐이었다.
나는 문학잡지 코너에서 현대문학의 부록으로 나온 이제하가 그린 그림엽서를 보다 말고 갑자기 그가 나를 구석에 쳐 박아둔 것 같은 울분에 강남역 공중전화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창 물이 오른 20대의 빛깔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순례였다.
시끄러운 주변환경 때문에 통화품질이 좋지 않았다.
그는 반갑게 전화를 받으며 회사는 잘 다니고 있느냐는 말부터 꺼냈다.
나는 다짜고짜 “오늘 일찍 퇴근했는데 시간 있어요?”라고 말했고 그는 “오늘은 출판사 사람들이랑 미팅이 있고, 다음에 내가 전화할게!”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바빠서,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관계가 어쩐지 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작품이 시작되었다.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다.
며칠 째, 야근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그날,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동료들과 함께 회사 근처의 식당에서 콩나물밥으로 저녁을 먹고 작업실에 들어와 웃으면서 의미 없는 수다를 주고받으며, 믹스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일을 하려고 자리에 앉았다.
권도현이 우리 부서와 연결된 통로를 통해 천천히 배경부로 들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친하게 지내던 배경부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권실장님, 맨날 배경부에 들어가서 뭐 해? 거기, 누구 친한 사람이 있어?”
“아니, 그냥 들어와서 한 번, 쓱 보고 가던데!”
배경부에서 나오고 있는 권도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꼬리와 깃털이 화려하게 장식된 조랑말들이 무지개를 타고 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이 엄지와 검지 손끝에 묻었다(흰 장갑을 끼었지만 예민한 촉각을 위해, 펜을 쥐는 엄지와 검지의 손가락 끝을 잘라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록 허드슨을 닮은 첫사랑과의 만남을 복기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진토닉을 마시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내가 던진 농담에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 그리고 거리에서 내가 말할 때마다 (키가 큰 그가) 나에게 몸을 잔뜩 구부리고 전폭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주던 모습(나는 그 기울기에 감동했다. 그 각도는 나에 대한 감정의 기울기라고 생각했다).
……이게 사랑일까? 나는 그런 달콤한 상상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두 장을 그리고 세 장 째였다.
라디오에서 DJ의 상투적인 멘트가 흘러나왔다. 나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집을 혼자 지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쪽지를 남기고 사라진 것 같은 느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수영언니의 책상으로 갔다.
“언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퇴근해야 할 것 같아요……”
바쁜 날이었지만 수영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으려다, 늦을 것 같아 작업 중인 씬만 선반 위에 올려놓고 가방을 챙겨 작업실을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갔다.
아홉 시쯤 되었을 때, 학원 앞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 한 무리의 수강생들이 나왔다.
그리고 서너 명의 강사들이 나란히 나왔다. 어두워서 잘 구별할 수 없었지만, 그중 키가 큰 남자가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혹시, 그가 나를 보고 웃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곧 아닐 거라고 단정하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들을 지나 학원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는 멈춰 있었다. 비상구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4층으로 올라갔을 때, 2차를 강의했던 김 강사가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지나치려던 생각을 바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용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현 강사님 계세요?”라고 물었고 그는 “벌써 갔는데……”라고 우물쭈물 말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왜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표정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하지만 잠깐 차 한 잔, 할 수 있을까요?”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와 나는 학원 앞에 있는 다방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현 강사님, 결혼하셨어요?”
그는 좀 화가 났던가. 분명한 발음으로 또렷하게 말했다.
“예, 했어요.”
그리고 빠른 말투로 물었다.
“현 강사가 결혼 안 했다고 그래요?”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숙이고 “아니요, 그냥 안 한 것 같아서……”라고 말을 흐렸다.
그가 다시, 학원 강사 특유의 강한 악센트로, 또박또박 천천히 물었다. 그의 말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현 강사가 결혼, 안 했다고 그래요?”
호의를 베푼 그에게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