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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랑비탈 Sep 09. 2023

6. 대부분의 사랑이란…

<소설> 애니메이션  회사


권도현에 대한 내 마음은 더 강경해졌다.

나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느 날, 셀을 가지러 간 나에게 권도현이 큰 소리를 쳤다.


“야! 셀을 말아먹냐?”


느닷없이 터진 그의 히스테리에 웃음이 “빵” 터져나왔다.

그때, 권도현은 나에게 말을 걸고 싶은 거라고,

그런데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켜,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권도현의 거친 말에서 수컷의 절박함을 읽었다.     

    



장편을 마치고 TV 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잠깐의 공백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퇴근카드를 찍고 일찍 회사를 빠져나갔다.


나른한 봄날이었다.

계절은 20대인 우리들에게 에너지를 꼬박꼬박 충전해 주고 있었고, 우리는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봄날의 나른함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나보다 한 살 위인 수화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우리 볼링 치러 갈까?”     


그 시간 뭐든지 해야 했던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래! 가자!”


며칠 동안 볼링장에서 볼링화를 빌려 신었던 나는 재미가 붙자 동생이 스포츠용품점을 운영한다고 했던 채경언니에게 볼링화를 주문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볼링화를 받은 다음 날, 채경 언니는 하루 종일 직접 그린 포스터를 들고 내가 있는 곳(선화부)으로 왔다.

채경언니의 행동을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던 칼라부 언니들도 채경언니의 동선을 쫓아 여럿 따라왔다.


회사에서 칼라부와 선화부를 대상으로 볼링 동호회 회원을 모집한다는 포스터였다. 참가비는 무료이고 끝나면 회식도 있다고 만화영화의 캐릭터들이 앙증맞은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채경언니가 웃으면서 들고 있는 포스터에 잠시 눈길을 주다 고개를 돌렸다.

채경 언니가 수상한 메신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말로 하지, 저걸 왜 힘들게 하루 종일 그리고 있었을까?  

나는 포스터를 들고 있는 채경언니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채경언니를 따라온 언니들이 한 마디씩 떠들었다.


“언니! 그럼 다 공짜야?”     


채경언니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등 뒤에서 대답했다.


“응, 회사에서 다 대준대! 어서들 가입해!”     


“역시 미국일 하는 데는 달라! 돈이 많다니까!”     


여기저기서 “나도!” “나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채경언니에 대한 소문은 입사할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건 그냥 무성한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채경언니의 재능은 너무 출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채경언니가 나에게 보여준 태도는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설마, 나에게 그가 내린 동아줄을 잡으란 말인가?


나는 그와 만나서 어설픈 수작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랑이란 결국 서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확인하고 끝나는 작업이라는 걸,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랑이란 쓸쓸함과 허무를 배우는 과정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희소성도, 가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순정을 그렇게 만나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커밍아웃 다음에 이어지는 권태……

나는 그 길을 그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 사랑을 지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관계의 연장선은 내가 긋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침묵의 방식으로 집요하게 내가 그를 유혹하고 있는 것인지도.

그것은 내 몸 어느 한 구석에서 뭔가 잉태되는 듯한 뭉클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볼링 동호회는 채경언니를 따르는 칼라부 선배들의 열렬한 환호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모임을 끝으로 초라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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